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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와 함께 한 행복한 열가지 추억
# 하나. 은서 첫 생일 / 2014년 9월 21일 일요일 저녁

오늘은 우리의 첫 아가 은서가 세상에 태어난지 일년째 되는 날입니다. 지금 은서 엄마와 함께 첫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조촐하게 생일케이크 하나 사서 초 하나만 꼽았어요. 남들은 뷔페에서 이런 저런 행사도 함께 하는데 남다른 사정이 있습니다.
우리 은서는 광주광역시 전남대학교 병원에서 25주 3일 470g으로 2013년 9월 21일에 태어났습니다. 원래대로 라면 2014년 1월 1일에 태어났어야 했거든요. 엄마, 아빠가 무척이나 빨리 보고 싶어서 쪼~~금 먼저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무척 의미가 있는 날이에요.

은서가 처음으로 병원 말고 차를 타고 멀리 갔거든요. 첫 생일을 맞아 은서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무척 고민이 많았어요. 폐가 덜 자란 상태에서 태어나 호흡기가 약해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지역은 가기가 좀 그랬거든요. 고민 끝에 광주광역시 포충사란 곳을 선택했어요.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 장군의 사당인데 잔디밭이고 입장료도 없는 좋은 장소입니다. 역시나 사람 맘은 다 똑같은지 온통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밖에 없었습니다. 근데 식당이 주위에 없어서 우리 가족의 첫 나들이 식사가 편의점에서 컵라면, 일회용 도시락으로 때웠습니다. 물론 은서는 맛난 이유식을 줬습니다. 식탐이 너무 많아서 무지 잘 먹거든요. 여튼, 평생 간직할 추억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마감합니다.

# 둘. 은서가 세상에 태어난 날 / 2013년 9월 21일 토요일 오전

오전 11시 40분경 은서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제왕절개를 통해 25주 3일 470g으로 우리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 당시는 너무 힘들고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행복한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전 아내가 갑자기 아기 태동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불안함에 병원을 가자고 했습니다. 산부인과에 방문하기로 한 예약일이 한달이나 남았지만 혹시 모를 불안감에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나름 광주에서는 이름 있는 산부인과입니다. 진료를 하고 소변검사를 했는데 단백뇨가 있다며 입원을 해서 진료를 하자고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입원절차를 진행하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전남대학교병원으로 가서 정확히 진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하여 서둘러 대학병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산부인과 선생님께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부부가 결정하기 어려웠던 일들을 정확히 판단하게 해주셔서 지금 우리 은서가 무사히 자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명을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 글을 빌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추천서를 들고 정신없이 쫓아간 전남대학교 5층 산부인과병동은 왠지 모를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입원실이 없어 옆 대기실에서 대기하며 진료를 받았습니다. 인턴선생님께서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시며 힘들겠다고, 단백뇨 수치가 높고 24주밖에 안되었다고.... , 그리고 그 다음날 다른 선생님이 오셔서 진료하시며 단호하게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얗게 된 머릿속을 가지고 멍하니 않아 있으니 교수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아기를 살릴 수 있다고, 기본적으로 25주 이상이면 살수는 있다고, 다만 장애가 올 확률이 높다고, 부모님이 선택을 얼른 해 주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부부가 선택해야 할 내용은 너무나 참담하고 어려웠습니다. 누구에게 상담할 수 도 결정을 맡길 수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우리는 무작정 버티고 있었습니다. 혈압이 너무 높아 주사약이 아니면 버틸 수도 없었던 일주일, 오직 25주를 채우기 위해 불안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25주 2일째 아이가 뱃속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으니 낳을 결정이라면 수술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500g이상은 되어야 살수 있다는데 아직 그 만큼은 안자랐는데, 더 이상 버티기에는 혈압 때문에 아기 엄마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에 20일 저녁에 분만실로 들어갔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수술실로 들어가 제왕절개를 하였습니다. 수술실 밖에 있는 제 앞으로 470g의 조그마한, 바짝 마른 은서가 인큐베이터에 실린채 지나갔습니다. 잡을 수도 없고 눈을 뜨고 지켜 볼 수도 없었습니다.

# 셋. 은서를 맞이한 아빠의 마음 / 2013년 9월 21일 토요일 오후

항상 감사하던 저의 마음이 원망과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을 나쁘게 살지 않았는데 엄마도 아빠도 건강하기만 한데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하루에 몇 번씩 하나님께 원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민했습니다.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장애가 있으면 어떡하지? 우리 아기가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해야 하는 것인지?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
24주에 전대병원에 입원한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밤을 세우며 고민하고 상담을 받고 인터넷도 찾아보며 생각을 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은 가시질 않고 결국 시간은 흘렀습니다. 아내는 더 버티려 했는데 버티지 못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결국 저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고 하늘이 정해준 이치대로 은서를 맞이하였습니다.
잠시 후 NICU에서 담당선생님께서 저와 면담을 하시자며 불렀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셨습니다. 25주 3일이며 500g이 안된다며 은서의 폐가 덜 펴져서 안 좋을 수 있다, 심장에 무리가 온다, 시신경이 덜 자라 눈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장애가 올수 있다. 등등 최악의 상황 수십 가지를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혼란스러워 멍하니 앉아 있는 제게 이제는 포기 할 수 없다. 낳은 이상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 강하게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며 병실로 가셨습니다.
잠시 후 저 혼자 아이를 보러갔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 아이에게 고통스런 삶을 주는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친구들 아이 낳을 때 여성병원 신생아실에서 보던 아이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삐쩍 마르고 온몸에 링거와 호흡기를 꽂아 놓은 우리 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 넷. 127일간의 NICU 생활 / 2013년 9월 21일 ~ 2014년 1월 25일

127일간 우리가 은서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저녁 7시30부터 8시까지 한정된 시간이었습니다. 2차례에 나누어 면회를 하기 때문에 단 15분의 시간동안 볼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산후조리 병원에 있다가 친정인 여수에 두달 넘게 내려가 있어 혼자 매일 은서를 만나로 갔습니다. 광주광역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퇴근시간이 되면 급하게 챙겨 병원으로 가야했습니다. 매일 가서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내주고 궁금한 사항도 물어봐주었습니다. 은서에게 필요한 여러 물품도 사다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NICU 제일 앞줄의 인큐베이터에 있는 우리 은서는 머리에는 작은 모자를 쓰고 한쪽팔에는 링거를, 다른쪽 팔에는 맥박기를, 코에는 폐까지 연결한 호흡기를, 입에는 위관수유를 하고 겨우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기를 만질 수도 없고 눈도 뜨지 못하며 혼자서 숨도 쉴 수 없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덜 성숙된 장기들로 인해 여러 차례 수술도 하였습니다. 제가 알지도 못하는 여러 의학 용어들 무슨 수치가 낮고,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치료를 했고 매일 매일 들었습니다. 하루 하루 그 모습을 보며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링거를 통해 필요한 영양분만 섭취하다가 처음으로 위관수유로 0.5cc를 먹었다는 말에 우리 부부는 너무 기뻤습니다. 먹어야 산다는 이치가 있듯 처음으로 무언가를 위장에서 소화를 한 것이기 때문에 절망이 조금의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절반이상의 시간을 금식하며 조금씩 수유량을 늘려가 결국 두달만에 1kg를 돌파했습니다. 85일째에는 스테로이드제까지 쓰며 유지했던 호흡기를 떼었습니다. 코에 있던 관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너무 가슴이 아프면서 다른 한편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호흡기를 뗀 후 수유량이 많아졌고 1.5kg를 금세 돌파하며 2014년 1월초에는 퇴원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에 절망스러웠던 선생님들도 조금씩 희망 섞인 메시지를 주며 희망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은서가 너무 잘하고 있다고, 정말 잘 버텨주며 건강하게 크고 있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태어난지 127일째인 2014년 1월25일 드디어 인큐베이터에서 나와 2.6kg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소아과 병동으로 옮겨 일주일동안 호흡상태와 수유량를 확인하였습니다. 엉망인 집도 치우고 소독하고 몸은 힘들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집을 꾸미었습니다. 한쪽 팔에 맥박기를 달고 비상용 산소와 호흡기를 가지고 우리 집으로 세명의 가족이 함께 왔습니다.

# 다섯. 심각했던 NICU 에서의 순간들 / 2013년 9월 21일~2014년 1월 25일

470g으로 제일 앞줄의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몸무게나 늘어나야 어느정도 안심이 되는 상황이었지만, 은서의 몸무게는 계속 줄어만 갔습니다. 430g까지 몸무게가 줄어들자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유하였습니다. 동맥관개존증이라는 신생아에게서는 흔히 나타나는 질환이었지만 아이가 너무 작아서 수술을 고민했지만 더 이상 몸무게가 줄면 안되겠다는 선생님이 판단에 따라 수술을 결심하였습니다. 지금 은서의 등에는 그때의 수술자국이 큼직하게 남아있습니다.
수술 후 가장 큰 문제는 은서의 호흡과 먹는 양이었습니다. 스테로이드제를 쓰고 위관수유를 하며 몸무게가 어느 정도 늘어나기를 기대하며 계속 되는 불안 불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혈압도 여러 차례 경험하고, 담즙도 넘어왔고 금식도 하며 힘들겠지만 의연하게 버티는 은서를 보며 희망을 갖고 더욱 부지런히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몸무게가 2kg가 되기 전 미숙아망막증이 찾아와 다시 수술을 해야겠다며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버티기도 힘든 은서의 건강상태를 생각하면 전신마취를 해야하는 수술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아직 2단계라 수술을 바로 해야겠다는 말씀에 다시 마음을 잡고 수술을 했습니다. 잘 버텨준 은서가 너무 감사합니다. 이후 매월 병원을 다니며 추이를 지켜봤으며 지금은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다며 몇 개월 후에 다시 방문하라고 하니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2014년 1월 퇴원하고 우리 은서가 3kg가 되었을 무렵 배 밑부분이 까맣게 부어올라 병원에 갔더니 탈장수술을 해야 한다며 다시 입원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난소와 옆의 장기가 제자리를 잡지 못해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며 수술을 권유했습니다. 3kg도 안된 아이에게 벌써 3번째의 전신마취 수술이라 너무 가혹했습니다. 다만 수술의 난이도가 낮다는 말에 안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퇴원하기 몇일 전 백질연하증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 여섯. 1억원의 병원비 / 2014년 1월 25일

조금씩 안정이 되어가자 눈 앞에 당면한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는 병원비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맨 처음 이른둥이로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전한 말이 건강이었고, 그 후에 병원비가 많이 들더라는 걱정이었습니다. 카페나 지인들의 말로는 4~5개월의 병원비가 1억가까이 나올것이라고 해서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억원을 병원비중 7천만원 이상을 공단에서 부담해 주었습니다. 선생님들 말로는 그 전에는 거이 지원이 없었는데 이제는 지원비율이 대폭 상향됐다고 하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태아보험을 가입하여 나머지 부분은 보험회사에 청구하였습니다.

[TIP]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되어있는 보건소에서 이른둥이에게 병원비를 몸무게에 따라 최대 천만원까지 지원해 줍니다.
그리고 동맥관개존증 같은 특이한 코드의 질환인 경우 오백만원이 추가 됩니다. 은서는 당연히 천오백만원을 받았습니다.
# 일곱. NICU에서 맞이한 100일 / 2013년 12월 29일

작고 조그마한 은서가 어느덧 100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생각지도 못했던 행복이었습니다. 100일이 될 때까지 큰 이벤트 없이 자라난 은서야 ! 너무 감사해.
몇일 전부터 고민을 했습니다. 멀 준비해야 하지? 먹을꺼는? 고생하시는 선생님들께 선물이라도 드려야 하나? 가족들 다 같이 가야 하나? 하지만 옆 인큐베이터에 아픈 아이들도 많이 있고 너무 시끄럽게 할 수는 없고 조촐하니 100일을 맞이 했습니다.
면회가 안되는 오후시간에 케이크 하나 들고, 선생님들 간식을 싸서 방문을 했습니다. 병원에 100일 용품들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은서를 이뻐해주시는 여러 선생님들과 축하노래도 부르고 초에 불도 붙이고 너무 좋았습니다.

아빠인 저는 100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은서를 만질수 있었습니다. 너무 작아서 은서가 다칠까봐 혹시 제몸에 있는 병균이라도 옮겨 갈까봐 멀찍이 서 있기만 했습니다. 결국 저는 얼음인 된채 은서를 두손에 꼭 잡고 사진만 찍었습니다. 그리고 얼른 다시 간호사 선생님께 맡겼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한우리 은서와의 첫 스킨쉽의 기억입니다.

# 여덟. 기나긴 재활치료의 시작 / 2014년 1월 ~ 빨리 졸업하기를 ...

백질연화증이란 어떤 병인가에 대하여 며칠을 공부하였습니다. 이른둥이들에게 생길 수 있는 질환이라 우리 은서는 제발 아니기를 바랬는데, 은서에게 그 증상이 보인다는 말씀을 듣고 말았습니다. 머라고 표현할수도 없이 가슴 한 켠이 너무 애렸습니다. 온갖 상상과 안좋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고 앞으로의 가야할 길도 너무 막막하여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은 크기가 크지 않고 전체적으로 조금씩 보인다는 것에 희망을 가졌습니다. 재활의학과에 외래를 받으며, 이런 저런 상담을 많이 하였습니다. 치료 시기와 방법 , 그리고 회수등에 대해 진중히 선생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결국 추운 초봄이 지나고 치료를 시작하자는 선생님의 고견을 따라 주2회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보이타 치료를 하며 눈물 흘리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너무 가슴아팠습니다. 치료 횟수를 늘리기 위해 여기저기 대기를 걸며 병원을 찾아다녔습니다.
지금은 2곳의 병원에서 주5회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아내가 주중에 4번 데라가고 제는 직장이 쉬는 토요일에 같이 가서 치료받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볼때마나 난리가 아닙니다. 매트에 눕히기만 해서 울고, 치료선생님만 봐도 인상씁니다. 그래도 치료선생님 말씀이 또래에 비해서 늦은 건 사실이지만 많이 따라 잡고 있다고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셔서 한결 마음을 놓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불안했습니다. 잠에 잠이 들때면 과연 재활치료를 통해 극복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은서가 하나둘씩 해나갈 때 어느덧 제 마음도 안정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몇 년동안은 더 치료를 해야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걱정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우리 은서를 기다려 봅니다.
은서야 힘내. 재활치료 얼른 졸업하고 병원안가는 날 놀러가야지 ~~

# 아홉. 행복한 세가족의 생활 / 2013년 9월 21일부터 계속 행복

2014년 1월 은서의 퇴원준비로 분주합니다. 우리 부부는 너무 행복한 마음으로 청소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우리 세가족이 한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온 집을 구석구석 쓸고 닦고 중고지만 아기 침대도 하나 장만하고, 젖병도 심사숙고해서 구입하고 소독기, 세탁기, 가습기 그리고 문 앞에 손 소독약까지 완벽히 준비하였습니다.
드디어 은서 집에 도착, 호흡이 안 좋고 밥도 잘 안먹고 여러차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너무 행복합니다.

2014년 4월 5일 은서의 교정 100일이었습니다. 상다리가 부러지가 상을 차린 은서의 교정 100일상. 장모님께서 오셔서 한상가득 차려 주셨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라고 수수떡도 하고, 과일, 전, 제가 좋아하는 고기도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무사히 자라준 은서가 너무 고맙고 대견스러워 여러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었지만 저의 부모님과 형제들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혹시나 은서의 건강이 걱정되어 조촐하게 우리 가족끼리 치른 행사입니다.
2014년 5월 날씨가 따뜻해져 유모차에 은서를 태우고 처음으로 인근 공원에 갔습니다. 그동안 밖이라곤 병원을 갈 때 제 차로 밖에 간적이 없어 모든 걸 너무 신기하게 보았습니다. 나무와 꽃, 멍멍이 하나 하나 은서에게 설명해주며 행복함을 만끽했습니다.
이제 조금씩 밖에 다니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주위를 산책하기도 하고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가기도합니다. 차를 타고 멀리 가지는 못하고 가까운 공원이나 문화시설에 가곤 합니다. 은서의 몸짓 하나하나 그리고 엄마, 아빠를 부르는 목소리에 더 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 은서와 처음으로 함께하게 될 모든 순간들이 너무 기대가 됩니다.

# 열. 이른둥이 부모들에게 전하는 은서 아빠의 마음 / 2014년 9월 26일

혜민스님께서 하신 말씀중에 “ 우리 지금은 힘들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지금의 어려움도 여름더위처럼 곧 지나가요. 지금 처한 상황을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가 없다면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내 마음가짐을 바꾸십시오. 그래야 행복합니다.” 란 내용이 있습니다.
다른 부모들은 쉽게 하는 아이와 외출하기. 우리는 혹시라도 아기의 호흡에 문제가 생길까봐 전전긍긍하며 고민합니다. 다른 부모들은 관심 없는 분야 공부하기. 재활치료 등 이른둥이에게 생길 수 있는 여러 분야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은서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너무 연약하게 보여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했습니다.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믿고 지금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준다면 분명히 부족함이 없이 자랄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다 무언가가 있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며 믿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이 글을 보시고 옆에 있는 조금 일찍 태어난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아이를 꼭 안아주세요. 너는 잘할거라고 아빠는 믿고 있다는 의지를 아이에게 심어주세요. 그럼 우리 아이들은 꼭 좋은 소식으로 화답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른둥이 부모님들 파이팅 ~~!

민지야 ...요즘 부쩍 생명의 탄생에 대해 궁금해 하며 니가 어떻게 태었났는지 늘 궁금하다고 그랬지?..
지금부터 너의 이야기를 들려 줄께..
니가 어떻게 태어났나면 말야

2006년 7월 8일 민지가 엄마 뱃속에서 27주가 되던날 너의 성장은 멈췄고 엄마는 임심중독증으로 높아지는 혈압과 건강이 자꾸만 나빠져서 유도분만을 해야했어 그래서 너는 596g 작은 몸으로 일찍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단다. 처음 너를 마주 했을 때 모습은 손바닥만한 작은 몸에 많은 주사바늘을 꼽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겨우 숨을 쉬고 있었고 너의 그런 모습에 가족들 모두 네가 살아서 가족들품으로 돌아올까 걱정과 불안에 매일 먹지도 잠도 잘 이루지 못했어.

지금도 그당시 담당교수님께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 "아기를 믿어봅시다.
3일을 버티면 일주일을 버틸껏이고 일주일을 버티면 한 달을 버틸 것입니 다.” 라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엄만 그말을 믿고 3일을.. 일주일을 한달을 니가 살아주길 밤새워 기도했단다.
니가 무사히 고비들을 넘기고 건강히 가족들품에 돌아오라고 말이야.

간절한 바램처럼 너는 신생아중환자실에서 3일,일주일 한달을 버텨냈고 김민지라는 이쁜 이름도 생겼단다. 그리고 인큐베이터에서 늘 바라만 보던 너를 엄마가 손으로 만지고 너의 숨결을 느끼는 날이 찾아왔어..
너무나 작은 너는 여저히 많은 주사바늘을 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너의작은 심장은 힘겹게 뛰고 있었지....

그때 엄마는 너를 쓰다듬으며 혹시 엄마의 욕심때문에 너는 편히 쉬고 싶은데 너를 붙잡고 힘들게 하는건 아닐까 하며 너에게 말을 건냈었어 그리고 한참을 손을 통해 너와 교감하고 손을 빼려 는 순간 너는 엄마의 손가락마디보다 작은 손으로 엄마의 손을 꽉 쥐어주었어.
마치 엄마의 생각이 틀렸다고 엄마품으로 돌아오겠다는 신호처럼 말이야.
그 순간 엄마는 포기가 아닌 너도이 고비들을 이겨내고 엄마 품으로 돌아오고 싶은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 단다.
그리고 엄마는 더 이상은 울지 않고 니가 집에 돌아올 수 있게 너를 맞이 할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단다.
이후엔 자꾸만 늘어만나는 병원비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알아 보고, 너를 잘 키우기 위한 많은 정보들을 구하러 다녔었지..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드디어 너가 인공호흡기와 산소 떼기를 한참 연습 중이던 낙옆이 만발했던 어느 가을 오후 면회시간에 신생아중환지실 담당교수님께서 캥거루 케어를 권해 주셨지. 엄마와 넌 매일 하루 2~3번씩 엄마는 한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엄마 서로의 심장소리와 체온을 느끼면서 교감을 하였어. 그렇게 몇주가 흘러갔고 늘 그래왔듯 엄마는 너를 가슴에 품고 노래를 불러주었단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니가 계속 쩝쩝거리며 엄마의 가슴 쪽에 고개를 돌리려 하는거야. 좀 다른 너의 모습에 담당 교수님은 엄마의 젖가슴을 물려보자고 하셨고 너의 입을 가슴쪽에 가져가니 놀랍게도 너는 젖을 물려고 고개를 돌리는 거야. 그런데 정말 아쉽게도 엄마는 너무 오래 너와 떨어져 있어서 젖이 말라가고 있었고 모유가 나오지 않아 너의 배고픔을 채워 줄 수는 없었지만 정말 기뻤단다. 우리 민지가 엄마를 본능적으로 알아보는것 같아 너무나도 기쁜 순간이었지.

그렇게 너는 가족들의 기다림 속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의료진들 축하속에 100일을 보내고 몇번의 수술과 고비들을 넘긴 후에야 5개월이 넘는 신생 아 중환자실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집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점점 늘어나는 산소요구량과 줄어드는 분유 섭취량으로 탈수가 오게 되었고 고열과 구토까지 시작되었지 그래서 점점 나빠지는 너를 안고 엄마는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야 했고 다시 입원하게 되었단다.
신생아중환지실을 나와 집에 온지 한달도 되지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계절은 겨울이 지나고 창밖엔 봄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지는시간 동안 너와 나는 집과 병원을 오가며 수많은 삶과 죽음사이의 고비들을 마주해야 했고 1년 가까운 시간을 장기 입, 퇴원을 반복해야했어.
장기간 동안 반복 된 병원생활에 걱정하며 발검음하던 주변사람들도 오지 않았고 연락들도 없었어. 더 이상 우리병실에는 너와 나 단 둘뿐이 였어..정말 작고 답답한 병실에서 얼만아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몰라.
하지만 엄마는 오직 단 하나 이 순간을 이겨내고 오직 니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으로 그 힘든시간을 버텨 낼 수 있었단다.

어느덧 니가 태어난지 1년이 되었고 또래 친구들은 10~15킬로의 몸무게 엄마라는 말도 하고 밥을 먹고 걸어다닌다는 이야기들이 들려 왔지만 너는 5킬로가 겨우나가는 몸무게와 먹는것이 힘들어 튜브를 통해 먹고 기어다니지도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해서 보조의자가 있어야 겨우 앉을 수가 있었어.
그 때문에 매일 작업 재활치료를 받아야만 했고 재활치료가 너무 힘들었는지 그때 너는 하얀 긴옷과 초록색옷을 입고 있는 사람만 봐도 놀래서 울기 까지 했었단다. 구렇게 병원재활치료를 받고 집을 돌아오는길은 늘 너는 지쳐 엄마 품에 잠들어 있었고 엄마는 거리의 또래로 보이는 다른 아기들의과 엄마 들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 부러워했어. 언제쯤이면 재활도 졸업하고 저렇게 너를 앉고 거리를 다닐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저런 날들이 과연 올까..
엄마는 꼭 그런날이 오길 기도했단다.

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빨리 오지 않았어. 넌 좀처럼 좋아지지 않고 위기의 고비를 넘길 때면 엄마는 너를 잃을까. 혹시나 니가 이 세상이 아픔만 가득한 곳으로만 알고 떠나면 어쩔까.. 하는 생각에 불안했단다. 그리고 나서 너와 함께 했던, 함께 하고 있는 함께 할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지. 그리고 너에게 무엇보다 너에게는 널 사랑하는 아빠, 엄마, 오빠가 있다는 것과 세상에 아름답고 즐거운것들을 보여주고 알려주고 싶었졌어.
병원과 집뿐이 몰랐던 병원치료로 지친 너에게 아름다운 음악도 들려주고 하얀 병원과 답답한 집안보다 아름답고 넓은 세상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단다. 마침 창밖에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너에게 이쁜 구름이 가득한 저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래서 엄만 집에 모아 둔 산소줄들을 창까지 길게 연결하여 꽁꽁 닫았던 커튼과 창을 열었고 너에게 파란 하늘을 보여주며 말을 걸었단다.
“민지야 저게 하늘이야.. 하늘 이쁘지?”라고 그때 민지 니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분좋게 활짝 웃음을 보여 주는 거야.
그리고 엄마도 니 미소를 보며 덩달아 웃었더랬지 그날 저녁 엄만 너와 보낸 시간을 돌일켜보면서 언제 엄마가 그렇게 너에게 활짝 웃어 봤을까? 생각했어. 근데 니가 태어나고 너와 나 이렇게 소리내며 깔깔거리며 웃었던 날이 없었더라구.
엄만말이야 늘 너의 건강 걱정만 하느라 불안한 얼굴로 너를 마주했던날이 많았다는걸 깨닳았어.
그리고 앞으로는 너의 밝은 미소로 너를 마주보고 혹시나 얼마남지 않았을 수도 있는 너와의 시간에 걱정과 불안보다는 함께하는 감사함과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이젠 많이 웃는날들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렇게 하루하루 너와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했고 작은 변화가 있을 때는 감사함을 잊지 않았단다.그렇게 소중한 시간이 흐르고 니가 태어난지 1년이 넘은 7월의 오후 너는 낮 동안은 산소를 쓰지 않을 많큼 폐가 좋아졌고 가족들과 지인들을 모시고 너의 첫 생일을 축하하는 돌잔치를 하게 되었단다.
그때 니가 잡은 돌잡이는 만수무강을 뜻하는 실이었는데 그 실을보며 당시 아직도 5kg 조금 넘는 작은 몸무게와 또래 아이들처럼 걷지도 기지도 잘 앉지 도 못하고 먹는 것이 잘 안되어 몇 번이고 토하고 먹기를 반복해 하루에 20번에서 30번이 넘게 옷을 갈아 입혔지만 언젠가는 잘 먹고 뛰어다니는 날이 올것 같아서 다른 어떤 돌잡이 물건보다 니가 잡은 그 실은 엄마에게 반가웠단다.
그리고 몇달 뒤 집안에서 그동안 너의 생명을 지켜주던 의료 용품들이 필요치 않아 정리하는 시간간 찾아 오게 되었고 의료장비가 있던 자리엔 장남감들이 놓여졌어.

그후 민지 너는 산소 없이 혼자 숨을 쉬게 되었고 몇 차례의 입원과 수술을 잘 이겨내고 니가 입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어. 그리고 세상을 향게 너가 걸을 무렴엔 엄만 이제는 한시름 놓아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해서일까?
너는 애착관계불안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외출과 다른사람들에 대한 불안이 매우 심해서 조금만 큰소리가 내거나 무표정이나 화가 난 사람들을 볼때면 두려워 자학을 하 거나 토할 때까지 울기도 하고 주변사람들을 안정이 될 때까지 피가 날 정도로 꼬집기도 했단다. 무엇보다 너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준 사람에게는 몇달이 지나도 기역을 하고 정을 주지 않았어.

그런 너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놀이치료,감각통합치료, 음악치료를 다니며 니가 심리적 안정을 찾기를 가족들과 선생님들이 정말 많이 노력을 했단다. 그런 불안이 심한 너의 사회성을 키우기 위해 사람이 많은 대형마트 도전을 시작했고 5일 째 되던 날이 였어 낮선 부부가 니가 이쁘다며 손흔드는 모습에 혹시 또 무서워하거나 울까봐 엄마가 달래려고 했지 근데 말야 너는 울지 않고 처음으로 낮선사람 에게 안녕이라고 손을 흔들어 줬단다. 절대로 안 변할꺼 같았는데 너무나 놀라운 변화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넌 마트가는 걸 참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어.

그렇게 너는 주변 또래 친구들은 쉽게 되고 얻어지는 먹고, 걷고, 말하는 것들을 천천히 너만의 속도로 많은 연습과 노력이 통해 하나 하나 발달과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고 불리불안증으로 엄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치료실 안에 까지 데려가 구석 에서 치료가 끝날때까지 기다리게 했던 니가 5살이 될 무렴엔 더 이상 유치원 문 밖에 엄마 없이도 친구들과 즐겁게 생활하고 죽이 아닌 밥을 혼자 먹을 수 있을 만 큼 몸도 마음도 건강지는 모습을 보며 아빠 엄마는 얼마나 니가 자랑스럽고 감동 스러웠던지 몰라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도 듣고 싶었던 너의 그 예쁜 목소리소리로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과 수업 중 배운 노래와 춤을 가족들 앞에서 보여 주며 들 려주는 순간은 너무나 행복하고 기뻤단다.

그 무렴 너의 동생 문경이가 엄마 뱃속에서 너와 오빠를 만나기 위해 자라나고 있었었지. 당시 아빠, 엄마가 용기를 내어 문경이를 가진 건 주변에 이른둥이로 태어나도 동생들은 10달을 채우고 태어난 경우가 많았었고 오빠를 3.2Kg로 건강히 낳았기 때문에 엄마는 10달을 꼭 채우고 문경이를 낳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말야. 엄마 몸은 문경이에게 10달을 허용하지 못했어. 그래서 결국 문경이도 민지처럼 아니 민지보다 더 작게 너를 낳았을 때와 같은 임신중독증 증상으로 26주가 되는날 450g으로 유도분만하여 태어나게 할 수 밖에 없었어.너에 이어 문경이까지 일찍 태어나게 한 엄마의 마음은 정말 괴롭고 아팠단다.

그리고 엄마는 걱정스러웠어 문경이를 다시는 못 보게 될까봐. 잘 못 키울까봐 정말 두려웠어 근데말야. 민지가 커 가는 모습들을 본 주변 사람들과 가족 친척들이 너를 처음 마주했을 때 해 주었던 말들과 달리 모두 건강하게 잘 클꺼라며 엄마를 위로해 주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런 위로속에 엄마는 다시 용기와 힘을 냈고 엄마눈 앞에 있는 너를 보며 문경이가 건강히 돌아와 너처럼 잘 자라 꺼라는 기대감과 믿음을 가지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 렸단다.

심리학 용어에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단다. 이 효과는 자신의 긍정적인 기대 가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유발함으로 기대에 충족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을 뜻하는데 기대와 믿음의 보답일까? 너보다 주수도 몸무게도 더 작게 태어난 문경이는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4개월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너처럼 산소를 달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산소를 달고 있는 시기도 너보다 짧았고 병원에 재 입원도 1~2번 정도 였어. 성장도 빨라서 문경이가 교정 6개월이 다 되었을 때는 정말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우량녀로 살이 쪄서 한 여름엔 땀띠 때문에 고생 하기도 했었 어. 아마 가족들의 안정적인 사랑과 보살핌이 잘 클것이라는 기대와 신념이 문경 이를 건강히 잘 크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엄만 생각이 드는군아.

2011년 10월 문경이의 첫돌이 지나고 아빠 엄마는 너희 3남매를 보며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문경이가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던건 너를 통한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민지가 살아줘서 옆에서 있어줘서 이렇게 아빠 엄마가 너희 3남매를 건강히 키울 수 있는 자신감과 무엇이든 해 낼 수 있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늘 어려운 일 앞에서도 회피하지 않고 너희를 위해 도전과 직면하는 태도로 더욱더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부모로 바뀌게 되었어.

9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덧 2014년 가을이 되었군아. 이제 너희 3남매는 자라서 오빠는 초등학교 4학년, 너는 2학년 문경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다시 암마도 직장 얻어서 일을 하게 되었어.

그리고 작년만 해도 화장실도 혼자 못 갓던 마냥 아이인것 같던 니가 이번 여름방학 오빠와 함께 한자급수 시헙보러 갔을 때 예상보다 빨리 끝나 시험에 엄마가 데리러 가지 못했는데도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혼자 차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고 열심히 공부해서 7급이라는 한자시험에 합격도 하나니 또 한층 성장한 니 모습 에 엄마 마음이 아주 뿌듯하고 자랑스럽단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매일 저녁 너의 숙제문제 너의 인성문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주변 니 또래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처럼 나누는 평범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평범한 일상들이 우리의 가정에도 찾아 온거야.
불과 몇년전에는 이런 일상들을 상상이나 할 수 없었는데 말이야.
민지야 그동안 엄마에게 딸로 태어나서 그동안 많이 힘든 고비들이 많았지만 잘 이겨내고 가족들 옆에 있어줘서 ..
아빠, 엄마가 밖에서 일하며 힘들때마다 너희 3남매의 사진으로 힘을 내고 웃게 만들어 줘서.. 부모로서 보람과 성장하게 해 주고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늘 함께 할 수 있음과 생명의 소중함의 감사함을 이런 평범한 하루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해 줘서 정말 고맙고 니가 자랑스럽 군아. 그리고 엄마에게는 앞으로 너에게 무슨일이 생기더라도 지금껏 고비마다 이겨내 왔듯이 넌 어떤 문제도 현명하게 잘 이겨내고 멋진 숙녀로 자라 날꺼라는 믿음이 생겼어! 그러니 이젠 용기를 내어 너의꿈을 꿈꿔고 도전해 보렴. 때론 그 길이 험하고 실패도 좌절도 있을 꺼지만 항상 너의 뒤엔 가족이 함께 할테니 힘을 내고 함께 너만의 속도로 도전해 보자! 화이팅!!

2014년 9월 21일 민지를 사랑하는 엄마가 .....

안녕하세요 25주 6일 790g 34cm 로 태어난 이른둥이 지후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지후는 진단서에 나오는 진단명만해도 28가지나 됩니다. 8개월을 입원해있었고 퇴원한지 2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입원해 있는동안 눈수술 두번, 앞으로도 예정이 있구요. 심장수술, 복막투석, 대장 수술 호흡곤란, 마취와 수술동의서를 수없이 써내려갔습니다. 살려만달라고 했습니다.
살려내니 하나씩 욕심이 듭니다. 더이상 수술은 없길 바란다고... 이야기를 글로 풀기에 한없이 길고 많은 이야기를 조금 들려드리려합니다.

  기다리던 아이가 생겨 잘 지내고 있는 도중 배가아파 병원에 갔더니 이미 자궁문이 열렸다고합니다.
양막이 밀려나오는 상황이고... 입원후 온갖 약을써가며 버텨봤지만 그렇게 25주 6일에 저희 아기를 만났습니다. 이른둥이도 안타까운데 12월 생이라니... 발달과정을 쫓아갈 생각하면 다른 아이들과 많이 비교될까봐 걱정이 많습니다.

지후가 태어나자마자 사진입니다. 두손에 쏙 들어올 크기인데도 사진으로 보니 커보이네요. 1키로도 안되는 작은 아기... 두려움과 걱정과 미안함과 눈물만 한없이 흘렸습니다. 매일매일 눈물바람으로 지새우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의지할 사람은 신랑뿐이였고,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가득했던 시기입니다.

지후가 태어나자마자 사진입니다. 두손에 쏙 들어올 크기인데도 사진으로 보니 커보이네요.
1키로도 안되는 작은 아기... 두려움과 걱정과 미안함과 눈물만 한없이 흘렸습니다.
매일매일 눈물바람으로 지새우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의지할 사람은 신랑뿐이였고,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가득했던 시기입니다.


이때까지만해도 상태가 좋았습니다.
잘자고 잘먹고 잘싸고,, 좋습니다 좋습니다 들을 때라 이대로만 자라다오 했습니다.
아무탈없이 살려만 달라고 했습니다.
25주는 그리 좋은 주수가 아니라고합니다.
병원에서는 모진말만 합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고 뭐가 턱 턱 막히는 기분.
매일 매일이 가시방석입니다.

기저귀도 너무커서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팸퍼스 xs라고 생전 처음보는 팬티라이너같은 사이즈가 기저귀랍시고
해외에서 주문해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거말고는 구할 곳도 구하기도 쉽지 않기때문입니다.
백조기저귀 한장으로 온 몸이 다 들어가는 사이즈에 일반 기저귀는 너무 컸습니다.


온몸에 주사바늘과 라인이 주렁주렁 걸리기 시작합니다.
들어가는 약종류도 많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정도로 분주해 집니다.
다 아기를 위한거라 부모는 바라만 봅니다. 매일 하루 2번씩 면회하는게
아이를 위한 제일 좋은 길이라 생각 했습니다.
아빠는 아기를 보며 무슨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래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서로 많이 의지가 되었습니다.
아기는 조금씩 인큐에서 크고 있습니다.
하나둘씩 문제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소변을 보지못해 얼굴이 부었습니다.
이것은 시작을 알리는 거였지요.

잠깐, 모유이야기를 할까합니다.
모유가 잘 나오는 편이라 열심히 유축을 했습니다. 이른둥이에게 제일 좋은 식사는 모유라 해서 열심히 1cc부터 짰지만, 저희아기는 금식을 많이 할 상황이라 많이 먹지 못해
이렇게 보관하는 양과 젖양만 늘어갔습니다.
냉동고는 다 치워지고 오로지 모유팩과 모유로 채워져 갑니다.
8개월이 지난 지금도 아주 적지만 아직 나오는 모유로 잘 먹이고 있습니다.

아이 몸이 붓기 시작합니다.
소변을 보지못해 이뇨제를 많이 쓰게 됩니다.
들어가는 주사약과 영양제, 먹으면 피토하는 상황으로 식사도 하지 못합니다.
교수님은 최악의 상황까지 말해주십니다. 그렇게 힘들어 하는 아기를 보면서 마음이 아파서 정이 들면 안될거 같아서 면회도 안가는 나쁜 엄마가 되었습니다.
바라만 보기엔 너무 힘든 시기 였습니다.
아이의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예상하기에 너무일찍 나온 주수와 이런 상태의 아이를 보며 출생신고를하고 OO신고를 하게될까봐 겁이 났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아기를 살리는 일이 잘하는건지, 아기에게 오히려 내가 못된 짓을 하고 있는건 아닌지...............
하루 하루가 고비였고, 교수님말씀으로는 아이만 버텨준다면 무슨수를 써서라도 살려내겠다 하셨지만 아이 상태는 점점 나빠졌습니다.
오늘 내일 하는 도중에... 복막투석을 시도해보자 하십니다.
이사진은 복막투석 후 사진입니다. 그 전사진은 차마 부모인 저도 보기 힘든 모습인지라.. 몇몇 사진만 올립니다.
1kg 도 안되어 모험이라 하십니다. 너무 작다고....

아이가 심하게 부어갈때 사진입니다. 눈이 팅팅부어 뜨질 못하고
머리 얼굴이 다 부어 뇌에 무리가 갑니다.
손발도 강직이오고 경련을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간답니다. 얼마나 힘들지 얼마나 살려고 아이가 버티고 있는지 저는 감히 상상도 못합니다.

복막투석에 온 기대를 걸었습니다. 제발 성공해달라고,, 이것만이 지금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의료진과 모든 팀과 상의 부모의 합의서 복잡한 과정을 다 거치고나서 아이는 복막투석에 다행이 성공합니다.

복막투석이 성공하고 아이는 차츰 붓기가 빠지기 시작합니다.
몸에서 노폐물인 소변을 보기 시작합니다. 한달. 두달 가까이 못보던
소변을 보기 시작합니다..... 신장이 다 망가졌을꺼라 예상했습니다.
너무 오래 무리가고 쉬었기 때문에 소변을 못볼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그저 살리기만한다면에 희망을 두고 실천한게
다행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아이가 붓기가 빠지고 좋은 소식을 하나씩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저렇게 되기까지 시간은 많이 흘렀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퇴원을 바라만 보고 있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가 퇴원하면 부러운마음에 다른 사람과 마음도 닫아버리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커뮤니티도 정보도 되도록이면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알면 알수록 희망이라는 단어가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붓기가 많이 빠져서 예뻐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몸의 강직은 그대로라 합니다. 두 다리가 뻣뻣하게 일자로 곧게 펴져있습니다.
반응이 많이 없습니다. 두팔은 펴지지 않습니다.
모은채로 딱딱하게 변했습니다.

점점더 몸의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이제 살렸으니 다른 문제는 없을거라고, 세상의 모든 신에게 부탁했습니다.
몇개월이 피말리는 시기 였으니까요.

손이 많이 부었습니다. 손 발 특히 사지는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지 자주 붓기 시작합니다. 동맥관개존증이라고 새로운 문제를 또 떠안았습니다.하나가 해결되면 하나가 터지고 하나가 해결되면 또다른 하나가 터져버렸습니다.
사람몸 하나 만드는게 그렇게 어려운건지 괜히 열달을 기다려서 아기를 만나는게 아니란걸 실감합니다.

가스가 많이 찬 사진입니다. 아직도 배는 심하게 부어있습니다.
동맥관개존증 수술을 급하게 하였습니다. 살리기 위해선 해야한답니다. 그저 생존을 위한거라면 할 수 있는건 다 하고 싶었습니다.

안아보고 싶었습니다. 잡아보고 싶었습니다.
엄마의 손길조차 못느끼고 누워있는 아기가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울면 안되는데 아이가 듣고 있을건데 좋은 얘기는 못할망정
엄마인 저는 미안함에 자꾸 울먹거립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진들인데,,, 이른둥이 사연 공모전이란 포스터를 보고 사진을 꺼내들었습니다.
저희 아이 같은 케이스가 없더라구요.
남들은 쉽게 얘기합니다. 쉽게 지나갈거라고.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도움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후 이야기를 쓰려고 이제서야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모유는 냉동고를 가득 채워 놓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친정집과 시댁으로 모유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아기는 금식을 몇개월씩 하고 있어 모유가 줄지 않아 쌓이기만 합니다.

선생님이 처음으로 만짐을 허락한 날입니다.
아이에게 해가 될까봐 내손에 균이라도 옮을까봐 조심조심 신경썼던 엄마의 손길을 처음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손을 알아보지 못하나봅니다.
건들면 주사에 힘들게 하니 만지는걸 싫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날 그만 귀찮게도 힘들게 하지말라고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스킨쉽을 하니 아기는 이제 편해지나봅니다.
계속 만지는데도 자신을 아프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서 안심이 되나봅니다. 이 작은 아기에게서 그런 것을 느껴야하는 엄마 맘은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점점 상태가 좋아지고 호흡기도 낮춰가고 컷던 인큐가 조금씩 꽉채워갑니다.
항상 자는 모습만 보여 조금 아쉽습니다. 이젠 엄마오는 시간에 눈떠주고 놀아줬음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우여곡절 100일을 맞이했습니다.
100일전에는 퇴원할거라 생각했는데... 병원에서. 맞이했습니다.
이날 처음으로 품에 안아본 날이기도 하구요. 호흡기를 떼지못해서 조심조심 선생님 도움을 받아서 아이를 받아 듭니다.
그러게 기다리던 품에 안은 아이인데 상상만햇을때는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았는데, 100일동안 마음의 수련이 되었나봅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행복만 합니다. 아직도 해야할 게 산더미지만 100일을 살아 버텨준 아이에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발도 이만큼 많이 자랐습니다. 발도장 꾹 해주고 싶었는데,
더 많이 컸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장루를 내서 응아주머니를 차고지내고 나중엔 복원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러고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 미숙아 망막증으로 눈을 수술합니다.
한번으로 끝났음 좋겠다 했지만 두번 세번이 이어져버립니다.
지금도 눈은 계속 안과에서 보고 있습니다.

아직 태어난지 몇일도 안됐는데...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은 마음이 아련해집니다. 진행상황 모니터에 0살은 우리 아기 하나뿐입니다.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있는데, 수근거림이 들립니다. 어머, 저 아기는 0살인가봐~ 0살에 수술도하네? 쟤 부모는 뭐했길래 아기가 수술을한대~ 보호자들끼리 하는 얘기였지만,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데다 작게 얘기하셔도 우리 아이 이야기라 들리나봅니다.
죄책감은 평생 지고 가야할것 같습니다.

호수도 콧줄로 바꾸고 저걸하면 돼지코가 된다합니다. 아이가 무척 싫어하네요 이젠 싫은건 표정에서 확 드러납니다.
제법 큰게 신기합니다. 누구 닮았나 싶었는데 예전에 비하면 엄청 이뻐지니 사랑스러울 따름입니다. 호흡기만 어서 떼길 바라는 마음이 이어집니다.

입천장도 이미 변형이 많이 왔다하더라구요...

인큐베이터가 바뀌었습니다. 이것도 인큐베이터라합니다 뚜껑이 열리는
많이 컸습니다. 인큐가 작아진다 장난으로 놀리는 선생님들도 생기기 시작합니다.
호흡기를 떼는날 6개월이 넘게 걸린것 같습니다.
너무 힘든 과정인데 글로 짧게 보여드리려니 진행이 후딱 되어버리네요.
온몸에 바늘 주사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떼어냈을때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이제 곧 집에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혈도 엄청 받았었는데, 제 피가 필요하면 바로 주고 싶었습니다.
온몸이 깔끔해졌는데도 퇴원못하는 이유
가끔씩 이유없이 호흡곤란이 옵니다. 숨을 못쉬고 온몸에 강직이오며
얼굴이 시커매졌다가 하얗게 질려버립니다.
성인은 포화도 90아래만 되도 난리라던데
저희 아기는 20까지도 막 떨어집니다. 아이를 때리고 자극주고 산소를 줘야 돌아오는
과정을

8개월 동안 익혔습니다. 집에가서도 제가 해줘야하는 상황이 오면
제가 배워야 했으니까요. 숨쉬라고..............
숨을 쉬어야 너가 산다고.

8개월의 입원기록의 비용은 엄청났습니다.
퇴원하기 거의 막바지쯤 찍은 사진입니다.
630만원은 중간에 납부하여.. 나머지 잔액을 내야 한답니다.
총 진료비는 3천이 훌쩍 넘었습니다. 공단에서 금액을 제외하고도요..
공단에서 제외안했을 총 액은 2억이 넘었는데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로 저정도 금액이 나왔습니다.
돈이 없다면.... 아기도 못살리는 거겠지요?
앞으로도 들어갈 돈이 많은데... 부모가 돈이 많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맘에 더 미안해지네요. 부자 부모 만나야 더 편했을건데...
하지만 우리를 부모로 선택해준 아이에게 더 많은 경험과 건강을 챙겨주고 싶은맘에 적어봅니다.



퇴원할때 선생님들이 무척 축하해주십니다.
저보다도 엄마같은 존재들이였고, 저보다 저희 아기를 더 잘아는 분들입니다. 정이 많이 들어서 간다니 아쉬워 하시네요..
그동안 참 감사한 분들입니다.

그동안 양가 부모님 우리집에 있던 모유를 처분할 날이 왔습니다.
이미 3개월 6개월도 훨씬 지나버려 아까운맘에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고 떠나보내야 할것 같아서 사진으로나마 남겨봅니다.
양이 엄청 많네요.

다 먹지 못하고 열심히 짰는데 버리려 정리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냉동실에 이렇게 많은 모유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초유는 꼭 먹이고 싶었는데, 모유팩 보면서 간호쌤들이 대신 전해주길바랬는데 아쉬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태어났을때 발 사진 입니다. 간호선생님이 보내주셨어요.
참 발이 앙증맞습니다...

퇴원후 요즘 근황은
물리치료 주 3회 받고 발달체크하기 아직 목을 가누지 못합니다.
교정주수로는 6개월이 되어서 빨리 따라가 줘야 한다고합니다.
안과 망막검사하기, 눈에 밴드를 차고 있어서 푸르는 수술을 다시한번 해야합니다.
시력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으나 좋아지길 바랄뿐입니다.
더이상 진행이 없길 바랄 뿐입니다.
청력검사. 청력검사는 아직 패스하지 못했습니다.
기다려봐야한답니다.
보이고 들리고 말하고 걷고 뛰고 기본적인 것들을 해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뇌도 백질연화증이 있어 지켜봐야한답니다.
호흡도 간간히 떨어지지만 횟수는 줄고 있고 집에서 모니터랑 산소를 다 대여해서 사용중입니다.
그래도 요즘 많이 크고 건강해진 지후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언젠간 천천히 도와주며 기다리면 좋은 결과 있을거라고, 다 커봐야 안다지만, 지후를 믿는다 말해주고 싶습니다.
잡고있는 희망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른둥이의 모든 분들께 응원도 많이 받고 싶습니다.
저희 아기가 모니터소리가 나면 글을 쓰다가도 달려가야하기 때문에 긴장속에서 쓰고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좋을텐데 엄마가 해줄 수 있는게 많지 않아 아쉽습니다.
저희 아기 잘 클 수 있게 응원 꼭 부탁드립니다.

아무탈 없이 건강하게만 자라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빌었는데 자꾸 욕심이 생기네요..
나중엔 이 힘든 시기 다 잊을 정도로 건강해져서 잔소리도 막 할 수 있는 엄마였으면 좋겠습니다.
친구같은 아들로 투정도 부리고 이 아이의 미래가 더 행복하길 바랄뿐입니다.
건강하게만 자라달라고하는데, 공부도 잘했음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 온갖 감정들도 다 느껴보고 세상의 모든 경험들을 하면서 후회없이 즐기며 살아줄거라 믿습니다.

지후의 짤막한 단편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후야. 엄마 아빠 곁으로 와주어서 정말 고맙고, 힘든 시기 다 지나줘서 고맙고 너한테 짊을 크게 준거 같아 항상 마음에 걸려. 하지만 미안하다는 얘기는 안할께.
미안한거보다, 살아줘서 고맙다고 긍정적인 말을 더 해주고 싶어.
엄만 나한테 왜 맨날 미안해해? 말구
엄마 나 사랑해주고 고맙다 말해줘서 고마워 라고 듣고싶어.
우리 지금 시기도 잘 지내서 나중에 웃으면서 이랬더랬지 하고 지나쳐버릴 정도로 행복해지자.. 사랑한다 아들

힘내라 아가야

작년 12월 산부인과를 찾은 우리 가족은 새식구가 생겼다는 것에 너무 기뻤습니다. 그 후 또 한차례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 쌍둥이라는 말을 듣고 그 기쁨은 두배가 되었습니다.
쌍둥이라 그런지 입덧도 더 힘들었으나 아이 아빠가 큰 아이를 봐주고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덕에 입덧기간은 잘 지나갔습니다. 그 후 좀 편해지려나 했더니 갑자기 배가 빠른 속도로 불러오기 시작했으나 쌍둥이라서 그런줄 알았습니다. 분명 일주일 전에 산부인과에 갔을때는 특별한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몇 일이 흐르니 이제는 눕지도 못하겠고 잠을 잘 수도 없고 먹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거기다 아주 미세하게 자궁뭉침이 주기적으로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집근처 큰 산부인과에 갔으나 양수양이 굉장히 많다고 수원에 있는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지금 상황이 심각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균관대학병원에 갔고 의사 선생님 말씀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입원에서 지켜보자고 하길래 집에서 가까운 동탄제일병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동탄제일병원에서는 양수양이 너무 많아 숨쉬기 힘드니깐 약간씩 양수를 빼면서 버틸 수 있을때까지 버텨 낳아보자고 했습니다. 하나의 태반에 하나의 양막이라 최악의 상황이라 했으나 그냥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양수를 1리터 빼고 이틀 에 2리터 빼고 했으나 생각보다 양수가 너무 빠른 속도로 차 올랐습니다. 자궁수축 때문에 수축 제제를 많은 양 맞아야 했고 무엇 때문인지 코피가 한 시간 넘게 자주 났으며 너무나 많은 양수 양 때문에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몸도 하루에 갑자기 2~3kg씩 붓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뱃속에 있는 아이도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뱃속에 아이들이 많이 힘들기 때문에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병원에 진찰을 받아보자 했습니다. 동탄 병원 선생님께서도 아기를 초음파로 보시더니 작은 아이가 심장이 많이 약한 것 같다며 다른 대학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주대 병원을 갔고 그 곳에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쌍태아 수혈 증후군 증상이라며 아산 병원에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족은 쌍태아 수혈 증후군 수술만 하면 다 잘 될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산병원 의사선생님께서는 하나의 태반에 하나의 양막은 그 수술을 할 수 없다며 양수 빼면서 끝까지 버텨보자고 하셨습니다. 3리터의 양수를 빼고 이도 얼마 안가 정말 빠른 속도로 차올랐습니다. 제 몸상태도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시 2.5리터의 양수를 빼고 정밀초음파로 아기 상태를 보았습니다.
아기 둘 다 지금 상태가 안좋다고 수술을 해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아이는 혈류량이 너무 많아 심근경색 상태에 있으며 작은아이는 혈류량이 너무 조금 흘러 방광이 너무 작아진 상태이고 다른 신체기관도 안 좋은 상황이라 하셨습니다. 아이들의 상태가 안 좋다니 너무나 걱정이 됐습니다. 그때 당시 25주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수술을 했습니다. 아이는 710그람, 530그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작은 몸에 여러가지 튜브를 꼽고 눈도 가리고 누워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보였습니다.하지만 태어난 아이들이 치료만 잘 받으면 될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삼일이 지나고 해도 작은 아이가 소변을 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분명 모든 신체기관이 다 잘 만들어졌는데 소변이 차지 않는다며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저희도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왜 이런 이상한 일이 우리 아이에게 일어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이 되어도 소변이 나오지 않아 관을 삽입해 이물질을 뽑아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소변이 차이기만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소변은 차지 않고 삽입한 관으로만 하루에 0.5에서 1리터의 물이 나왔습니다. 아이의 상태는 너무 안 좋았습니다. 장파열로 피부색은 검게 변했고 400그람 까지 말라갔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보였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의사선생님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으나 뼈밖에 남지 않은 몸에 그 많은 튜브를 달고 힘없이 지쳐서 힘들게 눈을 뜨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이는 40일 가까이 살았습니다. 지켜 보는 내내 안타까웠으며 세상에 태어나서 병원에서 힘든 시간만을 보내게 하고 세상을 떠나 보냈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도 없었던 기형 때문에 작은 아이는 그렇게 떠나 보냈습니다.

큰아이는 그에 비해 잘 자라주었습니다. 황달치료를 끝내고 폐에 염증치료도 잘되어 기관지로 연결된 튜브를 빼고 먹는 것도 좋아져서 위에 꼽았던 튜브도 빼고 이제 곧 코에 꼽고 있는 산소 튜브도 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뱃속에서 작은 아이 때문에 영향을 받아 뇌의 일부분이 괴사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지만 괴사 부위도 크고 뇌가 신체부위에서 아주 중요한 부위이기 때문에 그 또한 저희 가족에겐 충격이었습니다.
현재 아이는 아산병원 인큐베이터에 80일 가까이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아이의 괴사된 뇌 부분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그나마 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제 모유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속상합니다. 아직은 뇌 손상으로 인하여 아이가 어떤 불편한 모습을 보일지는 아직 모르나 인지, 시청각, 신체움직임 중에서 한가지 이상은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힘든 상황을 겪었는데 앞으로 평생 그런 힘겨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슬픕니다.
앞으로 퇴원 후에는 아이의 꾸준한 재활치료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거기다 오랜 시간을 병원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만큼 병원비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보건소에서 병원치료비에 일부가 지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긴 재활치료가 남아있는데 그 부분은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첫째 아이도 있고 미숙아로 태어난 둘째 아이를 두고 맞벌이를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분명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질 것입니다. 재활치료도 일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면 저희 같은 상황에 놓인 많은 미숙아들의 부모들이 이런 힘들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생명을 태중에서 키우고 낳는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행복한 일인지….2년 2개월 전 우리집 천사 은준이를 첨 만난 시간들이 떠오른다..
배가 만삭인 임산부가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이 부럽고…40주 10달을 다 채우고 자식을 낳은 엄마가 눈물나도록 부러운 시간들…..
임신 18주….어느 날부터 원인 모를 하혈이 시작되었다..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른채 1달여 시간을 침상안정을 하며 지냈고…결국 아이를 낳을수 밖에 없는 아니... 뱃속에서 꺼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22주 2일이라는 의학적으로 어떠한 가능성도 확답받지 못한 채말이다… 그때 몸무게 600g…..(고기 1근의 무게던가……22주 태아들은 400g대인데…우리 은준인 뱃속에서 발육은 좋았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알고보니…급성 양막염…아기에게 너무 죄스럽고..왜 내게 이런일이 생긴건지..어디서 잘못된건지 생각할새도 없이 난 초극소 미숙아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인정할수밖에 없는 현실이 눈 앞에 있었다.
부모인 우리도 의료진도 희망이라는 이름보단…염려와 걱정으로 은준이를 기다리는 긴 시간이 시작 되었다……(지금은 이 아이가 얼마나 귀한 우리부부에게…우리가족 모두에게..이 세상에 축복이고…하나님 세상을 열어준 보물…너무 감사하고.미안하고..)
그때는 재태주수가 너무 짧았기에 …그랬다…못난 어미의 모습이었다…
하루를 버티고….3일을 버티고..일주일을 버티고…시간이 갈수록 의료진으로 부터 생존의 가능성은 점점 긍정적이었지만..그 이후의 어떤것도 보장할수는 없다고 …..
은준이가 태어나고 보름에서 한달사이에 첫번째 고비가 왔다…미숙아들은 모든 기관이 미성숙하고 약하지만..특히 장이 약한데..장천공이 와서 배가 풍선처럼 불어나고..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면회를 가서 보면 정말이지…그 조그맣디 조그만 몸이 인공 호흡기에 의존해 힘겹게 숨을 쉬어가며 배는 시커멓게 부어…말로 표현 할수 없는 모습…혼자 외로이 인큐베이터라는 좁고 딱딱한 공간에서 엄마도 없이..사투를 벌이고 있는 가엾은 우리 아가…..
너무 몸무게가 적어 수술은 도저히 할수 없는 상황이었고..결국 배에 관을 뚫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생 살에 관을 뚫었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시간이 흘러 다행이 서서히 가라앉고..색깔도 조금씩 돌아왔다.
세균감염.. 염증으로 인해 혈소판 수치는 늘 떨어지고…항생제 투여와 수혈은 늘 했고…산소 포화도는 늘 불안정했다..
그래도 유축기로 열심히 유축해서 모유를 튜브로 먹으며 ..조금씩 성장해갔다..몸무게 1g 얼마나 절실했는지…어른들은 한끼만 과식해도 1kg이 증량하는데 미숙아들에게 1kg을 찌우기 위해선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힘겹게 우리 품에 오기 위해 조금씩 자랐고….그런 우리 아기에게 또 한번의 크나큰 시련이 찾아왔다…미숙아 망막증…인공 호흡기를 오래 하고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1차 2차 검사까지 별 문제가 없어서 마음을 조금은 놓고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망막에 비정상적인 혈관이 너무 많이 자라서 레이져수술을 응급으로 해야한다고…그것도 2번이나…시력이 거의 안나올 가능성이 높다고,,,명암 정도 구분하게 될지도 모른다고..하늘이 무너졌다..
엄마로서 이 아름다운 세상…좋은 세상을 제대로 보여줄수 없다는게 가슴 아프고 죄스러워….숨을 쉬기도 힘든 시간이었던거 같다…지금껏 힘겹지만 희망을 갖고 버텨왔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그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왔는지..우리 애기도…우리부부도…우리가족 모두…
절망적인 시간들 앞에 운명처럼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새벽기도..온종일 애기 면회 시간외에는 기도만 했다..오로지 하나님에게….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났다…서서히 시력이 회복되고…어느정도의 시력은 나올거라는 긍정적인 소식….너무도 감사하고 감사했다..

그 다음 숙제는 인공 호흡기를 떼야 하는데…너무 일찍 태어나다 보니 폐기능이 약해서 자가 호흡이 쉽지 않았다…그리고 인공 호흡기를 너무 오래해서 기관지 폐 이형성증 진단도 받게 되었다….엑스레이 사진을 보면 폐가 눈가루 날려있듯..뿌옇게 변해있었다..여러시도 끝에 산소줄 로 진전되고..그렇게 5개월 반이라는 긴 시간을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서 보내고…드디어 일반병실로 옮겨 1달이라는 시간을 엄마..아빠와 함께 보내며 집으로 돌아올 연습을 했다..일반병실에서 한달은 내인생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겨웠던 시간이었다...하루 2번 30분씩 면회때만 아쉽게 만났던 아기를 품에 안을수있다는 기쁨도 잠시...새로운 환경에서 애기가 적응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우유도 잘 먹지 못하고 ..계속되는 설사에..가끔씩 새파랗게 오는 청색증...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들이 잦았고,,과연 퇴원해서 이 아이를 내가 잘 키울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렇게 한달을 혹독하게 세상과 적응하고..탈장수술을 하고..mri상 큰 문제는 없어보인다는 소견을 듣고….산소줄은 떼지 못한채… 드디어 6개월 반이라는 병원생활을 뒤로하고 집으로 왔다…
의료진 말로는 산소줄 떼기까지는 몇 달이 걸릴지 모른다고….그런데 퇴원하는 그날… 휴대용 산소통에 의지해 집으로 오는 그 순간부터 또 한번의 기적이 찾아왔다…
산소포화도가 늘 불안정하고…95도 안정적으로 넘기지 못했는데…갑자기 100이 되더니 계속 유지하는 거였다…
집에 도착해 렌탈한 산소통으로 바꿔도 계속 100…..그리고 아이 상태도 넘 좋아보였고….우린 첨에 산소통이 고장난줄 알았을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힘든 병원 생활을 뒤로 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오니 우리 은준이 영혼이 평안을 찾은 걸까…하나님이 역사하는 시간이었다..
결국 퇴원 9일만에 산소줄을 떼어내고…그때부터 정기 검진..재활치료외엔 거의 병원 간적이 없었다 (탈장이 재발해 수술한거 빼고는)…다들 놀라워 할정도로 …

곧 2돌을 향해 가고있고 또래 아이들 보다는 조금은 작고..발달도 조금은 느리지만 거의 차이없이…천사의 모습으로 너무나 감사하게 씩씩하게 자라주고 있다..말하지 않으면 우리 나라에서 재태주수 3번째로 생존한 초극소 미숙아 였다는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감사하고 감사하다…그리고 행복하다..
은준이를 통해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알게 되었고…...살려주신 주님께 모든 영광 돌린다….
오랜 시간 은준이를 담당해주신…함께 울어주시고 …키워내주신 충남대병원에 소아과 장미영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정부차원에 바라고 싶은건 미숙아 부모들은 정신적인 카운셀링이 필요하다…그런 심리을 치유해주고 이해해줄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필요한듯하다…그리고 재활치료를 오랜 시간 받고 있는데…중간중간에 대기한 시간도 길었다…치료를 받아야하는 아이들은 많은데…선생님들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정부차원에서 더 많이 배출해주길 바래본다..그리고 신생아 집중치료실 간호사선생님들 한테도 부탁하고 싶다..미숙아의 부모들은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예민한 상태인데…조그만 더 따뜻하게 친절하게 대해 주셨음 하는 바램이 든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인큐베이터에 아기를 맡긴채..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기도 하고 있을 부모님들….아이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위대할 만큼 강하다는걸 기억하시고…기도하고 걱정과 염려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품에 안길 아기를 기다려 보길 …..바래본다…
다시한번 주님께 모든 영광 돌리며….긴 글 마친다…
소중한 우리 아들 은준아…윤은준….사랑해….고마워….

감사합니다.^^

이른둥이 채아 엄마로 산다는 것?
아직도 끝나지 않은 눈물…
미완성행복에서 희망으로 가는 지금, 채아,
그리고 우리가정 사랑해요

채아를 간단히 소개합니다.
  • 2009년 7월 8일 930g 환아로(여) 만성기관지 폐이형성증
  •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1년 1달 22일만에 퇴원
  • NICU에서 투병하다가 8개월 만에 기도협착으로 기관절개수술
  • 인공호흡기(홈벤틀러)담
  • 3개월 만에 홈벤틀러 띠고 산소 0.5 T캐놀라에 줌
  • 물리치료 1년에 정상적으로 걷게 됨
  • 집에 와서 콧줄로 먹다가 9개월 만에 미음에서 밥. 씹는게 안됨 – 아직까지 연속으로 씹는게 부족하여 재활 중
  • 2년 7개월만에 기관지 봉합수술 성공(T캐놀라 졸업)
    수용언어는 되지만 표현언어가 되지 않음
    음악치료를 통해 발성연습 1년 동안 치료
    음절로 의사표현, 아직까지 표현언어가 되지 않아서 언어치료 4회 받고 있음, 조금씩 좋아지고 있음
  • 장애통합반으로 등급을 신청해서 시립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음

2009년 7월 8일 탄생 (축복이 없는…)
19시 21분 드디어 채아가 자연분만으로 태어났다. 26주 930g으로… 이때 부터 나는 어두운 터널에 갇히고 말았다. 절망, 두려움, 눈물, 증오로 아이를 만나야만 했다.

맨 처음 미숙아의 개념도 몰랐고 상상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미숙아지만 저렇게 작을수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분만장에서 “김선영 님, 수고하셨습니다. 공주에요. 보조개도 들어가고 속 쌍커플도 있네요.”라고 교수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어깨 너머로 힐끗 아가를 보고 싶었지만 수십명이 원을 그려서 위급하게 웅성웅성 처치를 하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과 피곤함 속에 회복실로 이송되었다. 그냥 무작정 눈물이 흐르고… 두려움으로 떨고있었다.

“왜 아가가 울지 않을까?” 그 궁금증이 무서운 공포로 가슴을 도배하고 있었다.

신랑과 고모, 큰언니가 주치의 면담과 아가를 보고 왔다. 남편은 나랑 똑같이 닮았다고 무척 흥분되고 기쁜얼굴로 이야기 해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고모랑 큰언니는 얼굴에 미소가 없고 말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신랑이 그렇게 말한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우리남편을 존경한다. 힘든내색하지 않고 항상 다 잘될거라고 나에게 위로해 주는 채아 아빠는 긍정적이다.

NICU 첫 면회 하던날
그렇게 하루가 가고 다음날 아침…
신부인과 교수님이 회진하시면서 잘 될거라고 위로해 주셨다. 이제부터 열심히 젖이 안나와도 짜라고… 그래야 아가한테 면역력을 높일수 있다고…

나는 나오지도 않는 젖을 유축기로 마사지 하면서 한방울씩 담아서 냉장고에 보관하기 시작했다. 아가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아파도 참았다.

정오 무렵 큰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가보러 면회가도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건 무슨 뜻일까..?” 그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아서 실망이라는 단어와 오후 내내 머릿속에서 싸우면서 하염엾이 눈물만 흘렸다. 두려워서 점심때 면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큰맘먹고 저녁 떄 면회장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었다. 혼자서…

퉁퉁부은 다리를절룩거리면서 NICU에 들어섰다. 면회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인큐베이터안에 아가(채아)를 보았다. 나는 순간 내가 무얼 잘못 본것 같았다. “아..” 낭떨어지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금방 하염없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저렇게 작을수가… 게다가 양쪽 눈은 안대로 (붕대로) 친친 감겨있고, 꺽어질듯한 손과발에는 주사줄들이 주렁주렁 입속으로 기도삽관과 호흡기, 모니터는 뚜뚜뚜… 주변에는 긴 산소통과 약통들이 양쪽으로 수십개씩…. 긴박한 상황을 말해주었다.

잠시 주치의 선생님은 의료단어르 ㄹ쓰면서 설명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겠고, 단지 “폐가 안좋다”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폐에 물이 차고 폐포가 펴지지 않아 숨쉬는데 어려움이 있고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나는 NICU를 나오면서 “만성 기관기폐이형증”이라는 의료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면회후 극도로 예민해진 나는 모든 면회를 사절했다. 누구와도 반갑지가 ㅇ낳고 면회 오는것도 싫었다. 위로도 마음이 불편해서 와 닿지 않았다. 콧물이 입속으로 들어갈 정도로 울면서 집으로 퇴원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백일 이전에 채아가 인큐베이터에 있는 사진을 한장도 찍어 두지 않은게 아쉽다.
그떄는 너무 두렵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사진을 안남겼는데, 가끔은 그떄 모습이 뚜렷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궁금하다. 머릿속에 첫 장면만 저장되어있고 백일 이후부터 사진이 있다.


채아가 지금 건강해져서 이런욕심도 생기는 거겠지… 후후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것 같다.

첫 수술, 동맥관 개존중 수술
이때 나는 이 수술만 하면 숨쉬는데 도움이 되어 좋아질거라는 실낫같은 기대를 가지면서 다시 힘을 내보기로 결심한다.
의료동의서에 싸인과 함꼐 수술시간을 기다렸다.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젖이 흘러내려서 화장실에 가서 짜서 젖을 버리며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이 수술은… 마숙아들이 대부분하는 흔한 수술이었다.
호흡에 별 영향을 크게 주지 않았지만 작은 몸으로 칼 자욱을 견뎌내고 장하다.

지금도 채아 왼쪽 양쪽날개 부분에 수술자욱이 선명하다. 이 수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더 힘든 수술과 어려움이 찾아올지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었다.

채아는 병원에서의 치료를 기억하는걸까…? 지금도 손등과 발등에 수십개의 주사 자국 점들을 가리키며 아팠다고 표현한다. 병원에 가면 주사기, 병실 침대보면 싫다고 운다. 어람나 고통스러운 기억일까…?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을 내딸 채아야…

지금은 너무나도 미안하다. 엄마가 건강하게 태어나게 했으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텐데…

1년이라는 긴 싸움과 그안의 고비들…
몇년 지나고 알았지만 1년을 지켜봐야 된다는것은 생사와 관련이 있었다. 나는 1년이 지나면 다 좋아지는 걸로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렇게 변화없는 시간이 1달 넘게 가고 있었다. 친정 식구들은 태백산으로 머리도 식힐겸 기도도 하고 오자고 1박 2일 여름휴가를 권유했다. 젖몸살도 심했고, 마음도 내키지 않아서 거절했지만 언니 동생들이 가자고 성화다. 결국 유축기를 가지고 채아 면회를 마치고 남편이랑 강원도 태백 천재단에 가서 기도하기로 했다. 가는 내내 차안에서 모유가 나와서 손으로 짜면서 갔다. 태백 천재단에서 간절하게 마음을 올리고 아침을 맞이 하게 되었다.

이른 아침 신랑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내 휴대폰은 진동으로 해서 못들었다. 방에서 다급하게 옷을 챙겨 입으면서 나 보고 짐 챙기라고 하였다. 표정이 굳어있었다. 채아가 많이 안좋아서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숨을쉬지 않아서 전기 충격 맛사지로 심폐소생술을 한 상태이고 폐가 하얀게 석회화 되어 가고 있다고 위급한 상황은 넘겼으니 당황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그렇게 우리는 태백에서 분당까지 2시간 넘게 오면서 한마디 말도 없이 오는내내 가슴만 치고 있었다. 나는 눈물에… 남편은 계속 석사에 모든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채아도 알았을까? 자기는 어렵게 병과 싸우고 있는데 엄마 아빠가 여행갔다고 생각했나…?

급하게 NICU 면회장으로 들어갔다. 교수님이 담담하게 설명해 주었다. 폐사진을 보여주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자녀가 있느냐고….나이와 아직 기회가 있다고… 앞으로 2~3일이 고비라고 했다. 응급상황에 달려올수 있는 거리도 물어보았다.

간호사님이 채아를 인큐베이터에서 꺼내어 처음으로 보여 주었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눈망울이 똘망똘망 한지 머리는 방송이 같이 까맣고 얼굴에 살이 포동포동 올라와 있었다. 그전에는 항상 반대편 쪽으로 얼굴을 향해서 제대로 채아 얼굴을 불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예뻤다. 남편과 나는 하염없이 콧물과 눈물로 훌쩍훌쩍 NICU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돌어서서 집으로 향했다. 남편은 주차장에 도착하여 고모랑 통화하며 큰소리로 울기시작했다. 남편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쓰러져서 입주변에 마비가 왔다. 아무말도 나오지 않고 눈물만이 온방안을 가득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과 먹지도 먹을수도 없이 시간과의 싸움에서 어떤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면회를 가지 않았다. 신랑만 회사 마치고 간간히 면회를 다녀왔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애해야 한다고 했다.

3월 6일이 지나도 위급 상황은 오지 않고 채아가 잘 버티어 냈다. 나는 교수님 상담에서 뇌손상이 오면 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했다. 이 다음 자라서 채아가 아무 의식없이 살아간다면 그건 고통스럽고, 채아가 너무 불해안 삶을 원하지 않았는데 살아가게 하는게 싫었다. 물론 생명은 다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이떄 내가 자신이 없었고, 의미없이 살아가는게 싫었다.

그렇게 어느덧 백일 가까이쯤 인큐베이터에서 나오고 기도 삽관에서 산소경합기로 바꾸어 달기 시작했다. 모든 교수님과 간호사님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채아는 생명이 강한것 같다고 했다.

경합기를 달고 100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2.78kg
이때부터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 2번씩 면회를 다니게 되었다. 처음으로 가족들이 면회를 가게 되었다. 난 기쁜 마음으로 백일떡을 나누어서 선생님들과 먹고 채아도 안아보고 사진도 찍고… 모처럼 기대를 해보았다. 경합기가 콜르 눌러서 미워질까봐 얄팍한 걱정도 하고 채아도 그날따라 까만 눈을 똘망똘망 했다. 4kg 되던날 산소발생기로 바꾸었고 슬슬 퇴원교육도 받게 되었다.

작은 에피소드 (사건사건)
  • 작은 에피소드 (사건사건)
  • 하루는 태풍이 와서 정전이 되었다. 산소공급과 벤틀러가 작동이 되지 않아서 병원으로 가는 중 차가 막히게 되어 뒤돌아 119를 불러서 동네 큰병원 응급실에 가서 전기를 얻었다.
  • 홈 벤틀러가 무거워서 T캐놀라가 빠져서 채아가 색색거리며 호흡을 가쁘게 했다. 당황하지 않고 순간 T캐놀라를 다시 목안으로 삽입해서 기도유지를 시켜 주었다.
  • 재활치료 때문에 병원 외래라도 가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걱정어린 사람들의 시선들…
  • “아기가 어디가 아프길래 그러냐고” 구경삼아 보았다.
  • 채아는 거실과 베란다를 왔다갔다 유모차를 타고 햇살을 받았다.
  • 콧줄이 빠지면 채아는 어김없이 스스로 밀어넣었다.
  • 우유를 주고 살짝 안아만 주어도 분사하듯
  • 토하는 채아. 집에 수건으로 가득 쌓아놓았다

이제 남은건, 언어치료와 그밖의 치료들
채아가 있기까지 나는 지금도 매일 하루에 왔다갔다 6번씩 운전하며 재활을 다니고 있다. 외래는 지금까지 150번 정도 다닌 것 같다.
  • 언어치료: 어린이집에서 2번, 분당서울대에서 2번
  • 음악치료: 음악과 악기를 너무 좋아해서 1년동안 다녔다. 발성에도 도움이 되라고
  • 섭식치료: 2년넘게 음식에 예민해서 씹는게 부족하였다. 최근에 와서 바나나, 감자, 고구마 등 조금씩 잡고 먹었다.
  • 감동치료: 예민하고 모든 감각치료에 민감해서 치료를 받는다.
  • 작업치료: 손작업과 놀이작업을 통해 사물과의 상호작용을 익히고 있다.
  • 물리치료: 1년동안 잘 받고 걷게 되었다.
끝으로… 아주 달팽이처럼 가다보면
지금도 우리주변에 저와 같이 치료를 위해 병원을 오고가며 재활을 다니는 이른둥이 가족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순간 최선을 다해서 가다보면 한순간 다 좋아지더라고요. 긍정적인 마법의 성을 지어보세요. 막막함과 원망은 또 다른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주변의 도움을 받으세요. 저도 처음에는 이 세상을 원망과 질책으로 부정했지만 긍정적인 남편과 가족 모두 힘을 합쳐서 이겨냈답니다. 신기해요. 아주 작은 미세한 행동에 산 보다 더 큰 기쁜 감동을 받게 되더라고요. 저 자신을 깨고 인정하고 사회와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살아가니까 마음도 편해졌답니다.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채야 아직 표현언어가 되지 않지만 채아의 잠재력을 믿고 열심히 지지해 주렵니다. 지금도 잘해내고 있답니다. 장애통합반 어린이집에서 잘 적응하고 친구들과 상호작용을 배워 가고 있답니다. 제 딸 채아가 자랑스럽고 장합니다. 또 우리 채아를 열심히 믿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 사랑해요. 이제서야 진정한 완성의 행복을 맛 보았답니다. 오늘도 난 강심장이 되어 서두르지 않고 주변 눈치 없이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답니다. 지금의 채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족이 버틸 수 있는 작은 힘입니다.
60일의 기적
2014년 3월 12일, 31주차, 어느때와 다름없이 산부인과로 정기검진을 갔다. 우리 광복(태명)이가 얼마나 컸을지 기대반 설렘반으로 병원을 향했다. 예약을 하고 갔는데 담당 주치의 선생님께서 아이가 신종플루로 조기퇴근을 하신 바람에 다른 선생님께 검사를 받았다. 복부 초음파를 보시고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선생님, 지난달 검진결과를 한참을 보시더니
“불편한데는 없어요?”
라고 물으셨다.
“아직은 회사를 다니고 일을 해서 그런지 저녁이면 발이 붓는 것 같아요. 체중도 조절한다고는 하는데 계속 늘어서 걱정이네요.”
이라는 그런 일상적인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종아리 앞쪽을 직접 눌러보시고는
“다리가 좀 붓긴 했네요. 자주 맛사지 하시고, 잘 때는 높은곳에 두세요.”
라고 하셨다.
“난 요즘 부쩍 눈이 침침한데, 결혼전에 라식수술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혹시 인공누액을 써도 되나요?”
라고 여쭤봤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지난달에 비해서 애기가 거의 안컸어요. 금요일에 시간괜찮으면 병원에 다시와서 담당 주치의선생님이랑 다시 얘기해봤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라고 하셨고, 갑작스러운 얘기에 놀란 나는
“지난달에 28주차에 정기검진을 왔을때는 애기가 조금 작긴 했지만 머리크기는 평균치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담당 주치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건가요?”
라고 물었고, 선생님께서는
“그때에 비해서 애기가 거의 안컸어요. 지금 한창 살찌고 클 시기인데..... 이상한 것 같으니까 담당 선생님이 오시면 의논을 해서 대학병원에 가봐야 할수도 있겠어요. 혹시 임신중독일 수도 있으니 소변검사도 해보고 집에 가실께요.”
라고 하셨는데, 소변검사 결과 다행히 단백뇨는 나오지 않았다. 이전까지 한번도 혈압이 높게 나온적이 없는데 그날은 160 가까이나 나왔었다.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은 신랑과 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일단 집으로 왔고, 부모님 걱정하실까봐 말씀드리진 않았다. 이틀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멍하게 보내고 회사엔 3월 14일 금요일 오후 다시 반차를 쓴다고 말씀드리고 산부인과를 향했다. 신랑과 나는 이상없을 꺼라며 엄마아빠가 이렇게 건강한데 우리 광복이가 아플 리가 없다며 서로를 위로해주며 병원에 도착했다. 주치의 선생님은 이미 얘기를 들으신 상태이셨고, 초음파를 보시고는 소견서를 써줄테니 대학병원을 가보라고 하셨다. 혹시몰라 소변검사와 혈압을 다시 측정했는데, 혈압은 여전히 높은 상태였고, 단백뇨는 나오지 않아 임신중독은 다행히 아니라고 하셨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대학병원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엄마 뱃속에 있는것보다 빨리 세상에 나오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면 바로 수술을 할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고 출산할때까지 앞으로 대학병원을 다녀야 할꺼에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힘들고 요즘은 토요일에도 진료를 보는 병원이 많으니까 내일 오전에 가능하면 빨리 대학병원을 가보세요.”
라고 하시며 이왕이면 계속 다닐 것을 생각해서 가까운 병원 몇군데를 추천해주셨다. 병원에서 나올때 이미 6시가 넘어 토요일 진료 예약을 할수 없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가 붕 뜬 느낌이었다. ‘놀래고 충격을 받으면 이런기분이구나...’ 하고 느낌이 왔다. 인터넷을 통해 이것저것 검색해봤지만 태내 성장지연에 대한 안좋고 무서운 얘기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주치의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병원은 모두 토요일에 산과를 진료하는 교수님이 안계시다고 했다. 전공의밖에 없는데 그럼 또 교수가 와야지 결론이 날것 같아 다시 인터넷으로 대학병원 여러곳을 검색했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 두군데 다 다음주 화요일이 가장 빠른 진료라고 하였고, 신랑은
“이때까지 잘 있었는데 무슨일이 있겠어? 가깝고 진료를 잘한다고 소문난 대학병원에 기다렸다가 화요일에 가는게 낫지 않겠어?”
라고 했다.

그런데 난 이상하게 그전날 주치의 선생님의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토요일 아침에 대학병원 가보라는 얘기가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아 일단 대학병원 가서 검사를 받아보고 이상없다고 하면 다시 집 가까운데로 다니겠다고 신랑에게 얘기했다. 물론 이상이 없을것이라는 믿음을 전제에 두고 말이다. 겨우 여러군데 전화해보고 토요일 산과 진료를 보는 병원을 찾았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이었는데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까 예약을 안해도 최대한 빨리 오면 진료를 볼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아침도 먹지 않고 부랴부랴 챙겨서 병원으로 갔다. 보통 대학병원은 예약을 하고 오기 때문에 예약 환자들 뒤로 대기를 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혈압이 더 올라 180 가까이나 가 있었다. 1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진료를 볼수 있었다. 소견서를 보시고 일단 정밀 초음파를 보자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동네 산부인과와는 다른 복잡하고 큰 초음파 기계로 사진을 수십장을 찍는 교수님을 보는데 왜그리 긴장되고 무섭던지, 그 정적이 더 견디기 힘들어
“혹시 상태가 많이 안좋은가요?”
라고 조심스레 여쭤봤다.
병원을 오기 전까지도 평소 운동을 좋아했고 잔병치레 하나 없이 컸던 나였고, 신랑또한 건장한 체격으로 우리 부부는 누가 봐도 건강에는 자신있었기에 우리 아가도 큰 문제 없을꺼라며 ‘대신 출산전까지 정기검진을 자주 다니라고 하시겠지’ 라며 막연하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교수님의 표정을 보니 믿음이 걱정으로 모조리 바뀌었다.
교수님이 입을 떼는 3초가 3분보다 더 긴 것처럼 느껴졌다.
교수님께서는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애기한테 영양분과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못 큰 것 같다며 그대로 두게 되면 아가에게 위험할 수 있으니 빨리 수술해서 꺼내는게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날 안심시켜 주시기 위해
“오늘 엄마가 되셔야 겠어요!”
라고 하셨다. 일단 입원 수속을 받고 아기 심박동 체크를 하고 긴급수술을 해야 하겠다고 하셨다.
진료실을 나오는데 앞이 깜깜했다. 자연분만을 위해 걷기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인위적인 출산이 싫어 자연주의 출산을 여러군데 알아보고 그렇게 자연분만을 준비했던 내가 제왕절개 수술이라니.. 그것도 조산으로.... 대학병원 입원과 수술이라는 것을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감기가 걸려도 병원에 잘 가지 않을만큼 병원과는 친하지 않은 나였는데, 갑작스레 하게 된 수술에 어안이 벙벙했다. 일단 신랑은 입원수속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나는 간호사가 지시로 환자복으로 환복하고 수술전 각종 검사를 했다. 다행히 병원에 급하게 오느라 아침을 먹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음식물이 있으면 수술중에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다. 태아심박동 검사(태동검사)를 하는데 심박동수도 주기적으로 떨어졌다. 교수님께서 그 결과지를 보면서 이렇게 애기 호흡수랑 심장박동이 떨어지기 때문에 빨리 꺼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고, 정오쯤 병원에 도착했던 나는 1시 쯤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신랑도 많이 놀라고 경황없었을텐데 날 걱정해서 애써 침착해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몇일동안 꾹 참았던 눈물이 수술실로 옮겨지는 침대에서 왈칵 쏟아졌다. 아기가 많이 작아 전신마취를 해야 된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영영 못 깨어나면 어쩌지?’ 라는 수술에 대한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왔고, 그동안 엄마 뱃속에서 숨쉬기 많이 힘들었을 우리 광복이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마취를 깨고 보니 이모님과 신랑 얼굴이 보였고, 내가 마취를 안깨서 신랑이 걱정을 아주 많이 했다고 한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회복실까지 들어와서 내 얼굴을 보고서야 다시 나가서 기다렸다고 했다. 난 눈을 뜨자마자 애기상태를 물었고, 신랑은 신생아 집중 치료실(NICU)에서 찍어온 사진을 보여줬다. 정기검진때 1킬로는 조금 넘은 상태라 1킬로는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태어난 우리 광복이는 970g 의 작은 천사였다. 살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뼈와 가죽만 있었고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보기 많이 안쓰러웠다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광복이의 삶을 위한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첫날은 꼼짝도 하지못한 난 둘째날 NICU로 면회를 갔다. 하루 두 번 12시와 오후 6시, 20분간 면회가 허락되었다. 핸드폰 사진은 크게 나온편이었다. 실제로 보니 얼마나 자그마하던지 저 작은 아이가 뱃속에서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돌았지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기에게 그 기운이 전해질것만 같아서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수간호사라고 하시는 분이 인사를 하시며 부모와 의료진 그리고 아기가 한팀이 되어서 노력하면 금방 건강해질꺼라고 하셨다. 호흡이 완전하지 않아 호흡기를 붙이고 살도 없는 다리에 링겔을 꽂고, 가슴에는 심박동 체크를 위한 측정기가 붙어있고, 입에는 장기에 들어있는 찌꺼기를 빼기위한 호스가 삽입된채 인큐베이터에 힘겹게 누워있는 광복이를 보니 모든게 다 미안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인 것 같기도 했고, 태교를 열심히 하지 않은것도 미안했고, 이런 엄마를 만나 가장 편안해야 할 엄마뱃속에서 힘겹게 버텼을 시간을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하고 마음아팠다. 그리고 지금까지 힘들게 버텨준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당분간 장기속 찌꺼기가 빠질동안은 금식이라고 했고, 호스에서 녹색 찌꺼기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일주일동안은 양수에 불어있던 장기나 피부에서 붓기가 빠져 10% 정도 몸무게가 빠지는 것이 정상이라고 했다. 지금도 저렇게 여리고 작은데 970g에서 몸무게가 더 빠진다니 상상이 되질 않았다. 체중이 하루에 10~20g 꾸준히 빠지더니 결국 3월 20일에는 870g 까지 내려갔다. 거기다 이른둥이들은 황달수치가 조금만 높아도 예방차원에서 황달 광선치료를 시킨다고 했다. 눈을 가린채 몇십그램 빠진 것이 눈에 확 티가 난 앙상한 아들의 종아리를 보니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꿋꿋하게 잘 참고 우리 아들 민균(외할아버지께서 직접 지어주신 우리 아들 이름이다)이에게 좋은 기운을 주기위해서 노력했는데, 몸무게가 100g 가까이 빠지니 너무 안타까웠다. 영양제를 링겔로 공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빨리 먹어야 몸무게도 잘 늘꺼라고 했는데 하루빨리 민균이가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태어난지 10일만에 호흡이 좋아 코에 부착되어있던 호흡기를 뺐다. 그것 하나 빼는 것만으로도 내 속이 다 후련했다. 얼굴에 주렁주렁 달려있어서 얼마나 불편했을까... 민균이는 폐랑 심장은 좋은데 장이 아직 제 기능을 못한다고 이번주에 검사해보고 소화안되는 원인을 찾아서 막힌곳이 있으면 개복수술을 해야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제왕절개수술이후 2번째 닥친 시련이었다. 워낙 작기만 작지, 다른곳은 다 이상없이 튼튼할줄 알았는데, 저 작은 배에 무슨 칼을 댈 수 있다고, 나도 생살을 째니 아물때까지 아파서 움직이기 힘들던데 말못하는 민균이가 겪을 고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장문제로 아직까지도 2주넘게 금식중이었다. 면회를 가보니 오전오후에 나뉘어서 면회시간을 포함하여 1시간정도 캥거루케어를 하는 보호자들이 있어서 간호사에게 “저도 캥거루케어를 하고 싶어요.” 라고 얘기했더니 장에 큰 문제가 없으면 바로 시작할수 있고 수술을 해야 된다면 1~2주 후에 시작할수 있다고 했다. 담당주치의 교수님 면담이 주 2회 있었는데 면담후 다행히 민균이는 장이 막힌곳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성숙해서 그런 것 같다고 시간이 흐른뒤 괜찮아지길 기대해 볼 수 있겠다고 하셨다.

수술 안하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던지.. 민균이한테 잘 견뎌줘서 고맙다고 백번도 넘게 얘기한 것 같다. 기분좋은 소식으로 캥거루케어도 시작하고 이제 물도 1cc 씩 위장으로 연결된 호스로 넣어주었다. 물을 먼저 먹이고 몇일 지켜본 다음에 희석한 분유를 먹이고 또 괜찮으면 분유를 먹인다음 양을 차차 늘린다고 했다. 그동안 금식중이라 몸무게가 더디게 느는 것 같았는데 이제 먹기 시작했으니 민균이 몸무게가 쑥쑥 늘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곧 민균이와 집에 갈 수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매일 인큐베이터로 들여다보고 잘 보이지 않는 얼굴 자세히 볼꺼라고 이리저리 옮겨가며 그렇게 봤는데 캥거루 케어를 하는 첫날 드디어 내품에 안아보니 감동이 밀려와서 눈물 참느라 혼났다. 너무 작은 민균이를 내품에 안아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주고, 급하게 수술을 해서 낳다보니 내가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 실감이 안 났었는데 오늘 드디어 느낄 수 있었다. 이 따뜻하고 작은 생명이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란것을! 태어난지 딱 보름만에 민균이는 1kg을 넘기 시작했고, 희석분유 1cc 먹기 시작했다. 물론 위장으로 삽관한 호스를 통해서였지만 장에 문제없이 이렇게라도 먹인다는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초유를 먹이고 싶은 마음에 모유가 나올때부터 계속 3~4시간 간격으로 유축하고 있었는데 4월 9일 드디어 모유 10cc 먹기 시작했다. 몸무게도 간혹 10g정도 빠질때도 있었지만 하루에 20~30g 씩 꾸준히 늘어 1.17kg 까지 늘었다. 아직까지 소화가 완벽하게 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되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다른 곳에 문제는 없는지 복부 초음파부터 뇌초음파, 안과검사까지 여러 검사를 받았다. 안과검사 결과 시신경들이 일단 이상없이 자라고 있는중이라고 2/3 정도 자랐기 때문에 꾸준히 관찰해 보면 된다고 했다. 이른둥이들에게 미숙아막망증이 워낙 흔해서 걱정이었는데 아직까지 크게 문제없다고 해서 또 한숨 놓았다. 퇴원할 때까지 험난한 고개를 계속 넘는 기분이었다. 검사해서 이상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고개를 하나 넘고 한숨 돌린 느낌이랄까.. 캥거루케어는 아기에게도 안정감을 주고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고 엄마에게도 좋은 효과를 준다더니 나역시 모성애를 느끼고 몸이 건강하게 회복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남들은 출산후 2주정도 조리원 등에서 조리한다고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다는데 나는 병원에서 퇴원하고 매일 민균이 면회를 위해서 집에서 병원으로 출퇴근을 했다. 내 몸 조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빠지지 않고 가서 엄마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 다니다 보니 힘들다고 느낄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민균이가 회복되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4월 15일 태어난지 한달이 되는 날 민균이는 몸무게도 조금씩 늘어 1.35kg 이 되었다. 이때부터 하루 4번 먹던 것을 3시간 간격으로 8번으로 늘린다고 했다. 하루는 병원에 갔더니 민균이 손에 반창고가 있길래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빈혈수치가 안좋아서 수혈을 했다고 했다. 미숙아들에게는 종종 있는 일이라는데 난 또 마음이 아팠다. 엄마 뱃속에서 건강하게 클 시기에 미리 세상을 나와서 민균이가 고생하는것만 같았고, 그게 다 못난 엄마 탓인것만 같았다. 보통 2kg가 넘으면 인큐베이터에서 나올수 있다는 얘기에 그것만 기다리고 있는데 몸무게가 왜이리 더디게 느는지 한참을 기다린 것 같았다. 4월 20일에 드디어 1.5kg 돌파했다. 그동안 민균이가 너무 작아서 안아보기 겁이난다는 민균아빠가 처음으로 캥거루케어를 한 날이었다. 민균이도 편한지 아빠 품에서 잘 잤다. 발에 꽂혀있던 정맥주사는 한달에 한번 위치를 바꾼다고 머리에 꽂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아가들은 머리 혈관이 제일 튼튼해서 발보다 머리가 낫다고 설명을 해주시기는 하는데 보기에는 왜이리 안쓰러운지 수혈, 영양, 정맥주사까지 몸에 주사바늘이 3개나 있었다.

염증수치도 높아져서 항생제까지 맞았는데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항생제 맞고 나니 수치가 다시 떨어졌다고 했다. 민균이가 얼마나 힘겹게 버티고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다시 굳게 마음을 다 잡곤 했다. 담당 주치의 첫 면담시에 민균이가 31주차 6일에 태어났지만 체중으로 보면 28주 아기들 체중이라서 예정일까지는 병원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될꺼라고 하셨었다. 37주 지나고 2킬로 넘어가면 퇴원시키곤 하던데 민균이는 워낙 작아서 2달정도는 입원해야 될꺼라고 하셨었다. 그래도 희망적인 얘기로는 37주가 지나면 1.8kg만 넘으면 인큐베이터에서 나올수 있다고 하셨다. 4월 25일 몸무게도 잘 늘고 잘 먹던 민균이가 아침부터 소화가 안된다고 하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몸무게가 하루만에 60g이나 늘어서 기분좋게 캥거루케어를 하러 병원에 갔는데 갑자기 배에 가스가 많이 찼다는 얘기를 들은것이다. 배가 고픈 민균이는 금식명령을 받고 보채고 울고 있었다. 얼마나 마음이 안좋은지.. 물론 수술을 안하는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장이 덜 성숙했던지라 소화시키는 문제가 끝까지 속을 썩였다. 5월 2일 태어난지 한달하고 보름만에 드디어 1.81kg 으로 우리 민균이가 인큐베이터에서 나왔다. 막상 아기바구니에 눕혀있는 모습을 보니 또 왜그리 작은지 다시한번 놀랬다. 그래도 이제 퇴원까지 정말 몇일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너무 설레고 좋았다. 퇴원하기전에 가스가 너무 많이 차서 또 다시 한번더 금식을 했지만 이틀정도 상태를 지켜보고 다시 우유를 먹기 시작했다. 퇴원하기 전에 뇌에 이상이 없는지 MRI를 찍어본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어찌나 떨리던지, 이상없을꺼라고 혼자 주문을 외워보지만 무슨 검사이든지간에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너무 떨렸다. 민균이는 이른둥이들에게 흔한 미숙아막망증이나 가벼운 뇌출혈도 전혀없고 MRI도 이상없다고 했다. 뇌가 살짝 부어있기는 하지만 이른둥이들에게는 장기들이 다 미성숙한 상태라 큰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우리 민균이는 단지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서 조금 빨리 세상에 나온 것 말고는 너무너무 건강해서 다행이었다. 퇴원하기까지 하루하루가 또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NICU에서 나와서 신생아실에 3일정도 있다가 수유연습하고 원래 예정일인 5월10일을 넘긴 5월 16일에 2.33kg으로 퇴원했다. 약 60여일의 병원생활을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 가족이나 민균이에게 기적같은 시간이었다. 건강하게 퇴원하게 도와주신 의료진분들께도 너무 감사했다. 병원에 있는동안은 엄마대신 민균이를 사랑으로 잘키워주신 덕분에 민균이가 건강하게 잘 클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민균이를 품에안고 집에 가는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직은 보통 평균 아이들보다 작은 민균이를 과연 내가 집에서 잘 키울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엄마라고 하는건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당연히 할 수 있게 갖춰진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잘 할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집으로 오니 모유를 먹이고 싶은 욕심에 모유수유를 고집했다. 병원에서는 소화가 잘 안되니 미숙아분유를 먹이는게 좋겠다고 했지만 계속 분유를 먹다보면 모유를 안 먹을 것 같아서 병원에 문의해보니 모유를 조금씩 먹여도 된다고 했다. 아직 소화제, 비타민 등 먹어야 되는 약이 많아서 직접수유는 안되지만 유축한 모유를 젖병으로 물렸더니 잘 먹었다. 계속 젖병으로 먹이면 유두 혼동이 와서 나중에 직접수유가 힘들다고 하는 얘기를 들어 걱정이 되었다. 일찍 태어난 것도 못내 미안하고 계속 유축만 하기에는 젖양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직접 물리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다. 한달정도 유축해서 먹이다가 병원에 문의해 보니 하루에 한두번은 직접수유를 해도 된다고 했다. 그때부터 모유수유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출산의 고통보다 모유수유가 더 힘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달여까지의 유축으로 젖양이 많이 줄었고, 유두 혼동이 온 민균이 붙잡고 하루종일 어머님과 땀 뻘뻘 흘리면서 씨름해서 겨우 젖물리기는 성공했는데 줄어든 젖양은 쉽게 늘지 않았다.

노심초사 민균이가 쑥쑥 커야하는데 괜히 내가 모유수유를 고집해서 많이 못 크는가 싶어서, 모유수유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분유를 먹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지만 그래도 모유만한 보약이 없다고 믿고 아직까지 완모를 잘하고 있다. 민균이는 9월 15일 만 6개월이자 교정일로는 만 4개월인 지금 6kg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몸무게가 평균 또래들보다 모자라긴 하지만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 민균이 할머니는 아직도 한번씩 민균이가 품안에 안겨있는 것이 꿈만 같다고 하신다. 지금이 당신 살면서 가장 행복하다고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다고 손주사랑을 표현하신다. 민균이가 없는 지금 우리 가족은 상상할 수도 없다. 앞으로 민균이가 크면서 우리에게 어떤 큰 기쁨을 줄지, 커가는 이쁜 모습을 지켜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다. “민균아, 엄마 아빠에게 와줘서 너무 고마워! 민균이가 우리에게 온 것은 기적이고 행복이야! 사랑해
이른둥이 은우 이야기
저는 36세 8살 공주와 18개월 왕자를 둔 부산에 사는 워킹맘입니다!

첫째 임신과 출산을 너무 수월하게 해서 둘째 임신 또한 마음먹고 가졌고, 편안하게 예정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리하지 않게 첫째를 만삭때까지 일을 하면서 잘 낳아 둘째도 만삭 때까지 일하려고 마음먹고 예정일 5월 31일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 3월 29일 오후쯤 배가 주기적으로 아프기 시작해서 앉아 있지를 못했었어요. 첫째 때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유도분만과 무통주사고 출산한 터라 그 아픔이 진통인지 모르고 참고 견디고 있었는데 뭔가 흐르는 느낌이 났어요. 피가 보이길래 병원에 전화를 드렸더니 이슬인것 같다고 빨리 병원으로 방문하라고 하셨어요. 부랴부랴 갔더니 내진 후 괜찮다면서 약 처방 후 귀가 조치를 하시더라고요. 맘 편히 먹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는데 진통 간격이 더 짧아져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시 방문을 하니까 입원을 권했습니다. 그때가 늦은 대처인 줄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해서 입원했고 조산예방주사도 맞았으니 또 참아보고 견디는데 더 심한 것 같아 재차 말씀을 드리니 그때서야 분만 실로 잠시 오시라고 하시더군요. 깜짝 놀란 건 벌써 3선체 이상 자궁문이 열렸다고 다급해진 병원 측에서 인큐가 없으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양산 부산대학 인큐가 가능하다 하여 부른 배를 움켜지고 엠블란스 침대로 이동 중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좋은 문화 병원에 한 자리 있어 갈수 있다고. 양산은 한 시간 거리인데 10분거리에 가능한 병원이 생겨 너무나 기뻤습니다. 도착 후 수속 밟는 중 한 시간 안에 선생님이 오신다고 걱정 마시라고 전달 받고 대기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휴무이신데 지나시던 길 제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옷 갈아 입으시고 오셔선 바로 진행하자고 하시던데… 정말 또 감사드립니다.

들어가자마자 6분만에 1.71키로 31주 이른둥이 남아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출산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말을 해주죠! 너무 작았고 가슴이 미어져 죽을 것만 같았어요. 울고 있는 저에게 천천히 알아 들을 수 있게 아들 상황과 상태를 이야기 해주셨던 과장님 또한 감사했습니다. 지금부터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아기가 잘 이겨 낼 거라고, 조심해서 오랫동안 품어 지켰어야 하는데… 미안해 울기만 했습니다. 하루 이틀 달라지고 잘 이겨내고 있는 아들 보며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너무너무 편안해 보이는 아들 얼굴 봤을 때 기뻐서 또 울고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다가 오신 분들도 많던데 이유가 있던 거 같더라고요. 이른둥이는 2kg가 넘어야 퇴원이 가능해서 한 달하고 6일 후에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별다른 문제없이 퇴원했고 마지막 미숙아 망막증검사도 아주 불편하게 해 아기가 많이 힘들어했지만 정상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젠 더 이상 아픔은 없다는 걸 알았는지 무럭무럭 크기 시작했어요~ 성질 급한 제 아들 무럭이만큼 커준 것도 감사한데 몸무게며 키는 상위 1%라고 병원에서도 집에서 많이 잘 키우고 왔다며 이른둥이 공모전에 꼭 한번 나가보라고 추천을 해주셔서 정성을 다해 자필로 손수 앨범까지 만들어봅니다. 이렇게 많이 잘 커줘서 한번도 못해본 공모전까지 우리 아들보고 용기 내서 참여해보고… 더 좋은 일 많이 하며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어요. 이른둥이 답지 않게 빠른 성장과 발달 모습에 주변에서도 극찬을 해주십니다.



남의 얘긴 줄만 알았는데 막상 저의 일이 돼버렸고 그래서인지 미숙아만 보면 제 아기인 냥 사랑스러워 보여요. 모든 지인의 축하와 격려의 힘입어 돌잔치도 너무 잘했습니다!

요즘 늦은 결혼에 늦은 출산으로 인해 이른둥이 출산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른둥이 부모님께 힘내시라고 전하고 싶고요. 작게 낳아 크게 키우라는 옛말이 있듯이 장군으로 키울 겁니다.
지금까지 이른둥이 은우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605g의 나의 천사
재태 주수 23주 3일 생각지도 못한 만남.
몸이 이상해 진료를 앞당겨 찾은 산부인과에서 양수가 새고있는 걸 수도 있다고 대학병원에 가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남편에게 연락을 해서 편도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는 길 제발 무사 하기를 아무 일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병원 도착 후 응급실에서 진료를 보는데 아기의 발이 자궁 밖으로 나와 있 다는 말에 앞이 깜깜하고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저의 무심함 으로 우리 아가 세상 빛을 못 보게 될까봐 우리 딸 많이 보 고 싶었는데 얼굴도 못보고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보내게 될까봐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응급수술 후 마취에서 깨고 제일 먼저 한말 “아가는?” 저의 머릿속은 온통 아기의 생존여부였습니다. 살아만 있게 해주세요. 살아만 있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남편에게 빨리 가서 아기의 안부를 확인해보라고 ‘아기는 신생아 중환자실로 들어갔어’라는 남편의 말에 당장이라도 보러가고 싶었는데 아직은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불안했습니다. 혹여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엄마 품에 안겨 보지도 못하고, 힘차게 울어 보지도 못하고 엄마 아빠 오빠 얼굴도 못보고 가게 되면 어쩌나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이였습니다. 드디어 기다림 끝에 남편이 아기를 보고 왔는데 저에게 아기를 보러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 딸 당장 가서 꼭 안아주고 싶은데 가지 말라는 말만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남편에게 왜 못 가게 하냐고 화도 내었습니다. 다시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데 뒤돌아선 남편의 어깨가 더 축 쳐져 있었습니다. 남편도 울고 있었습니다. 같은 병실 32주 산모들이 아기를 뱃속에 지키기 위해 입원해서 안정을 취하는 모습을 보는 저는 부러웠습니다. 우리 딸도 32주였으면 조금 더 컸을 텐데.. 하는 생각에 입원해 있는 내내 맘은 더 아팠습니다. 탱탱 불은 젖을 직접 수유 하고 싶었지만 병실 안은 윙윙윙 유축기 돌아가는 소리만 허공에 맴돌았습니다.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저에게는 하루아침에 꿈도 못 꿀 일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을 설득해 딸과의 만남을 갖도록 했습니다. 너무 놀라지 말라는 남편의 말에 마음 단단히 먹고 찾아갔는데 손바닥만한 체구에 드라마나 다큐 프로그램에서만 보던 온 몸에 주렁주렁 달린 주사 줄들, 보이지도 않는 작은 입에 꽂혀있는 무시무시한 인공호흡기, 삑삑 울어대는 장비들 놀라지 않을 거라 맘 약해지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눈으로 보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내 아가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내 딸 고생했지 힘내!’하며 웃어주고 싶었는데 두 눈 가득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닦고 닦았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교수님과의 면담. 아기가 너무 작아서 하루하루가 고비라고.. 처음 3일 그다음 일주일 그다음 한 달이 고비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아가 제발 살려만 주세요... 살려만 주세요... 빌고 또 빌었습니다. 아픈 아이의 엄마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잘 버텨준 아기가 고맙고 감사하고 더욱 더 사랑스러웠습니다.
며칠 뒤 새벽에 병원에서 아기가 폐 기흉이라고 호출이 와서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달려가서 도착해 보니 이미 처치가 끝나고 작은 가슴에 호스를 꽂고 있었습니다. 몸에 호스를 꽂은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런 응급수술. 동맥관개존증! 3차례의 약물을 써봤지만 혈관이 막히지 않는다고 태어 난지 이제 겨우 13일 몸무게는 출생 후 더 빠져서 400g 밖에 되지 않아 수술도 못한다 했는데 수술이라니 떨리는 마음으로 교수님과 면담. ‘이번엔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 어떻게...어떻게... 내딸 사랑하는 내딸 어떻게... 울며 포기하자고 아프게 지내다가 하늘나라 가면 어떻게 하냐고 그럼 더 마음 아파서 어떻게 하냐고 아기도 잃고 가족도 잃고 다 잃는다고 했던 남편의 말. 하루를 살아도 살아 있다고 어떻게 포기 하냐고 저는 절대 그렇게 못한다고 우리 딸 잘 이겨 낼 거라고 장애가 생겨도 살아만 있어 달라고 수천만원, 수억이 들어간다 해도 절대 포기 못한다고 남편에게 울며불며 매달렸습니다. 남편과 저는 그럼 수술 결과를 담대히 받아들이기로 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내딸아 엄마 목소리 들리지? 사랑하는 내 딸 엄마 품에 한 번도 못 안아 봤는데 한번은 안겨봐야지 엄마가 꼭 안아 줄게 제발 살아만다오 지금처럼 잘 견딜 수 있지? 벌써 한 번의 고비를 잘 넘겼잖아 힘내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저는 이순간에도 기도 말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게 없었습니다. 수술이 끝났습니다. 긴 수술시간 내내 긴장을 해서인지 수술이 잘 됐다는 말에 깊이 내뱉은 저의 숨소리에 제 몸도 같이 땅으로 꺼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정신을 붙잡고 회복실로 가서 마취에서 깬 딸아이를 보았습니다. 잘 견뎌준 딸아이가 너무도 고맙고 대견했습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남편과 저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흘렀습니다. 안도의 눈물이였습니다. 이름을 빨리 지어줘야 더 건강해 진다는 말에 동서가 이름을 지어왔습니다. 이제 우리 딸 예쁜 이름도 생겼습니다. 이름을 불러 볼 수 있게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우리 딸에게 들려주는 이름 ‘서안아.. 서안아... 너도 들리니? 꼼지락 꼼지락...하는 모습을 보니 이름이 너도 맘에 드는구나. 예쁜 내 딸 엄마가 이름 많이 많이 불러줄게’.

수술도 잘 되고 하루 이틀 일주일 그렇게 두 달이 지나가고 차츰 이제 안정기에 들었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수술. 딸아이의 장이 괴사가 진행 되서 응급으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고 몸무게 900g 에 폐는 지난번 수술로 인해서 더 안 좋아 졌다고 하셨습니 다. 아직 딸의 손도 못 잡아봤는데 또 그 차가운 수술대에 보내야 한다니 울고 싶지 않은데 또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 다.
그렇게 3년 아니 30년 같던 3시간이 지나고 배에 주머니 를 달고 수술실에서 나오는 내 딸 이번에도 잘 이겨내 주었습니다. 마지막 수술이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이제 점점 서안이 안고 집에 올 생각에 설레이고 있던 중 또 한번의 수술 이번엔 눈! 미숙아 망막증 제발 망막증만은 지나가주길 바랬는데 이번에도 어김 없이 내 딸에게 찾아 왔습니다. 한번으로 끝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미숙아 망막증은 재수술까지 해야 했고. 교수님을 원망도 해보고 세상에 너무나 일찍 보내주신 하나님 원망도 해보고 10달 품어주지 못한 못난 제 자신도 원망해봤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렇게 네 번의 힘든 수술이 지나갔습니다.
기적 같은 날들이 합쳐져 100일이라는 시간이 왔고. 처음으로 인큐베이터 안으로 손을 넣어 우리 딸 손을 꼭 잡아보는데. 혹여나 손이 부셔지진 않을까 힘도 못주고 엄마 왔다고 말해주니 엄마 손을 꼭 잡아주던 우리 딸. 간호사 이모들이 100일 이라고 ‘아직은 많이 크지만 조금 더 자라면 입히세요’ 하시며 예쁜 옷도 선물해주셨습니다. 엄마 품에 안겨 보진 못했지만 모유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하루하루 잘 이겨내고 있는 딸이 저는 너무나 대견스러웠고. 뱃속보다는 밖의 세상이 두렵고 무섭겠지만 저는 딸이 잘 이겨 내리라는 걸 믿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속눈썹이며 젖꼭지도 없었는데 어느새 하나씩 하나씩 생기고 엄마 뱃속에서 처럼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그렇게 생명을 위협하는 세상과 싸우며 성장해가고 있었습니다.
시골에 사는 저는 딸을 보러 갈 때면 새벽부터 서둘러 아들은 학교에 보내고 고속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딸을 보러 가야만 했습니다. 늘 분주하고 힘들었지만 이시간이 너무나 설레였고 행복한 상상을 합니다. 우리 딸 얼마나 컸을까? 모유는 얼마나 더 늘었을까? 키는 컸을까? 하루 못 봤는데 눈앞에서 아른아른. 병원도착 면회 1시간 전 오늘도 첫 번째 순서로 면회 신청을 하고 두근두근 설레이는 맘으로 기다려 드디어 면회 시간이 다가왔고 내 딸 얼굴을 보니 설레이는 마음 불안한 마음 다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왔습니다. 면회15분 더 오래 보고 싶었지만 다른 엄마들도 예쁜 아가를 봐야 되니깐 다음을 기약하며 유리창 넘어 딸아이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다음에 오면 우리 딸 눈뜨고 있는 모습 보여 줄꺼지? 예쁘고 커다란 눈 꼭 보여주기야~ 사랑 한다 내 딸.
이제는 오빠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온 식구가 서안이를 만나볼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십니다. 내 사랑 기적 같은 내 천사.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 인규베이터에서 길고 긴 5개월이 지나고 서안이를 맞을 준비에 벌써부터 맘이 분주해지고 이불빨래며 구석구석 먼지들 묵은 때를 벗기듯이 말끔히 다 치우고 서안이와 함께할 산소통, 산소발생기, 산소포화도기계, 호흡기치료기 친구들도 다준비해두었습니다. ‘우리아가 어서 엄마 품에 오렴’.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처음 집에 온 날은 불안해서 자는 딸을 보며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열은 안 나는지 혹여 울고 있는데 (산소호흡기를너무 오래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 습니다.) 알아 체지 못할까봐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장루백을 달고 와서 처음이라 소독하는 것도 서툴고 어설프고 산소수치가 삑삑 울어대면 저도 같이 불안 해 했지만 하루하루 행복할 날들을 함께 하면서 ‘엄마 이제 좀 능숙해졌지? 불편한곳은 없지? 아직 목소리가 나질 않아 웃음소리 우는 소리 못 들어봤지만 방긋방긋 웃는 모습 보니 엄마가 해준 처치가 맘에 들었나 보구나!!’하며 자심감도 생 겼습니다. 이제 저를 보고 눈도 마주치고 방긋방긋 잘 웃고 살도 좀 올랐는데 온지 일주일 또 다시 폐렴 입원. 이른둥이에게는 폐렴이 가장 위험하다고 하는데 걱정이 앞섭니다. ‘내 딸 이번에도 파이팅하자. 언제나 처럼 잘 이겨내자. 엄마에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주일을 선사해줘서 고맙다 내 딸아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되면 엄마 품에 안겨 우리가족 예쁜 꽃구경도 하고 예쁘게 사진도 찍자~ 약속~~ 엄마 자주 자주 찾아올게 너무 외로워 하지마 알겠지?
엄마 또 올게~’인큐베이터 속 딸아이의 손가락을 잡고 속삭여봅니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꽃구경 가기로 한 봄이 오고 우리 딸 엄마 품으로... 딸은 또 금새 많이 컸습니다. 낳아 놓으면 금방 큰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됩니다. 딸과 함께 꽃구경은 못했지만 저에게 꽃보다 더 아름다운 제 딸이 있어 행복합니다. 그 어느 꽃향기보다 딸아이의 살 냄새가 가장 향기롭습니다. 다시 제 품에 안을 수 있게 해줘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딸은 집에 오더니 묘기를 보여줍니다. 팔 다리에 힘이 없어 앞으로 배밀이를 못하고 똑바로 누워 목을 뒤로 젖히고 위로 개구리가 폴짝폴짝 뛰는 것처럼 하는 행동이 신기하기도 하고 내 딸 많이 컸구나하며 기쁘기도 했다가 목이 부러질까 머리는 괜찮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병원 네모난 틀 인큐베이터에만 있어 안보여 갑갑해서 고개를 자꾸 뒤로 빼서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려고 하다가 그런 행동을 보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삑삑 기계 소리만 나는 곳에 두고 안아주지 못한 제가 죄인처럼 느껴졌습니다. 다시 한 번 딸아이와 굳게 다짐을 해봅니다. ‘엄마가 많이 안아 줄테니 우리 조금씩 조금씩 뒤로가 아닌 앞으로 가는 배밀이 연습해 보자.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엄마랑 같이 해나가는 거야. 힘내자 내 딸아!!’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너무 일찍 태어났기에 주변 사람들이 딸의 존재를 모르고 있어 저에게도 딸이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서 아직 산소호흡기를 떼지 못해 불안해서 병원에 돌잔치를 해도 되냐고 확인하고 돌잔치를 했습니다. 돌잔치 하는 내내 산소 호흡기는 꽂고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축복해주고 함께 기뻐해주셨고 딸아이도 아무 탈 없이 돌잔치를 치뤘습니다.

딸에게 쓰는 편지
내 딸 서안이에게
엄마에게 와줘서 고맙고 사랑해.
1년 동안 많이 아프고 외롭고 힘들었지? 아플 때마다 엄마를 얼마나 많이 찾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매이는구 나..
엄마 없이도 꿋꿋하게 잘 이겨 내줘서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 단다..
이제는 물건을 잡고 일어서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탐색도 하고 혼자 힘으로 해보려고 애쓰는 네 모습에 엄마는 더 없는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 너로 인해 기적을 경험하고 있단다...
지금처럼 잘 해왔듯이 우리 올해 안에 걸을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서안이 옆에서 힘을 실어줄게 힘내자 파이팅!! 사랑 한다 서안아.... 엄마가 많이많이 사랑해!
사랑하는 엄마가.

605g으로 태어나 힘든 고비 함께 해주시고 태어나면서 부터 퇴원 할 때 까지 매일매일 육아일기도 기록해 주시고 항상 재입원 할 때면 일반병동에 입 원해야 하는데 편도 두 시간 거리에 사는 저희 가족 특히 큰 아이 걱정에 맘 못 놓는 제 마음 알아주시고 신생아중환자실 에서 더 세심히 돌봐주시고 이른둥이 파티에서도 많은 이른둥 이들 사이에서 특별히 서안이 깜짝 돌잔치까지 챙겨주신 천안 순천향대학교 병원 신생아 중환자실 교수님 간호사 선생님들 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외래 다닐 때도 주렁주렁 산소통이며 산소포화도 모니터며 가방까지 짊어지고 가면 보 시고 바로 오셔서 도와주시고 편의 봐주시는 소아과 간호사 선생님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 빚을 다 어찌 갚을까요? 서안이 건강한 모습으로 대신 갚아도 되겠죠!!

잦은 동생의 입퇴원 반복으로 엄마의 부재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까지 생긴 아직 어린 8살 우리 아들 엄마 손길이 많이 필요할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엄마한테 투정한번 부리지 않고 동생 걱정하고 기도해주고 소원이 동생 안 아픈 거라고 말해주는 고마운 우리아들 엄마가 많이 사랑해! 엄마의 빈자리까지 채워주느라 엄마 몫까지 해주는 우리 신랑도 너무 너무 고맙고 사랑합니다.
우리가족 흩어지지 않고 나약해지지 않게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도와주신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의 기도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보건소의 이른둥이 지원 덕분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우리 서안이 지금처럼 건강해 질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이 살아 온 날 보다도 수없이 많고 어떤 어려움이 눈앞에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처럼 잘 이겨 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저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서안이는 기적이며 행동 하나 하나가 감동입니다. 605g 우리 서안이 세상의 희망이 되고 이른둥이 가족들의 희망이 되어 앞으로도 건강히 잘 지내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사는 충남 태안에는 이른둥이를 치료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 아프면 편도 두시간정도의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달려가야 하고 발달이 느려 재활치료가 필요함에도 소아재활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 장애인복지관에서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현실에 마음이 아픕니다. 제 딸 같은 이른둥이 들이 병원 걱정 안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래봅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이른둥이 가족이 겪고 있는 정신적. 육체 적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에 많은 관심을 바라며 미숙아예요? 라며 이방인을 쳐다보는 눈길이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 전해 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길 바라는 마음과 이른둥이 가족들이 절대 희망을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 적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특별한 선물] 외할아버지의 이른둥이 양육記
[운명처럼 850g의 <승리>를 만나다]
아프다. 그냥 아프다.
그토록 힘들었던 걸 부모로써 모르고 지나치다니……
정말 몸과 마음이 다 아프다.
크게 엄마를 찾지 않고 노는 4살짜리 큰손녀의 모습에 눈물이 날만큼 더 아프다.
2012년 2월 초순,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그 해 겨울, 둘째(태명: 승리)를 임신한 딸애는 6차월로 접어들면서 힘이 들었던지 하혈을 하였고,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집근처(분당)에 있는 산부인과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사위는 회사의 긴급한 일로 해외출장을 가게 되었고, 나와 아내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큰손녀를 돌보아주기 위해 딸네 집에 원정파출부(?)로 나서게 되었다.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입원한지 열흘쯤 되었을까?
컨디션도 좋아지고 해서 이삼일내로 퇴원을 고려하던 딸애는 밤 12시가 넘어 화급을 다투는 위급상황 발생으로 보호자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바로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조기 양막파열.
의사는 애를 낳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것도 생사를 알 수 없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가족들은 망연자실했다.
이제 6개월이 조금 지났는데, 40주중 이제 겨우 26주차인데···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여지껏 살아오면서 듣도 보지도 못한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딸은 밤새 입원실과 분만실을 오가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의사는 초음파 결과 아이는 다행히 머리가 밑에 있고 숨소리도 괜찮다했지만 우리를 위로하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비상용으로 틀어놓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이의 심장박동소리가 보호자들을 힘들게 했다. 마치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는 것처럼·····

며칠이라도 더 견디어 몸무게가 최소한 1kg은 넘을 수 있으면 하는 가족들의 안타까운 바램을 뒤로 하고 승리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입원 3일만에 세상 밖으로 나와 버렸다.
기쁨과 환호성이 넘쳐나야 할 분만실 밖에서 가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26주 3일, 850g, 보통 태아의 1/4정도밖에 안 되는 몸무게.
이게 아이란 말인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미숙아, 이른둥이, 초극소 저체중아, 생존율 5~60%.
승리는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급히 귀국중인 아빠 품에는 안겨보지도 못한 채)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 몸무게로 과연 살 수나 있을까? 살아도 제대로 클 수나 있을까? 커가면서 별 문제는 없는 걸까? 이 아이로 인해 가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릿속에는 의구심과 암울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고,
주변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107일간의 도전 - 희망을 키우다]
승리는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있다.
원래대로라면 배가 불러오면서 커가는 아기에 대해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때인데···
나중에 딸한테 들은 얘기지만 1월 하순경 은행에 다녀오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진 것이 결정적이었나 보다. 임신 중이라 발목을 접질린 상태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물리치료만 하면서 버티었다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어찌할 것인가. 울기만 하는 딸애의 속은 오죽할까. 면회는 하루 2번-점심과 저녁때- 뿐이다.
너무 조그마한 게 인공호흡기를 끼고 여기저기 호스로 연결되어 누워있는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결혼 2년차에 첫아이를 정상적으로 자연 분만했고, 딸애의 야무진 성격대로 1년간을 모유로 키워냈던 터라 둘째에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1kg도 안 되는 이 아이로 인해 딸애의 창창한 인생이 장밋빛이라기보다는 회색빛이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바윗덩어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매일 아침 병원에서 보내준 문자 메시지 <금일 아기는 880g입니다. 분유 1cc씩 먹고 있습니다.>에 안도하다가도 <금일 아기는 820g입니다. 금식하고 있습니다.> 하고 거꾸로 가거나, 무슨 수술얘기가 나오면 저 조그마한 게 칼댈곳이 어디 있다고 낙심이 되면서 차라리~ 차라리~하는 나쁜 생각조차 들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은 약이다.
차츰 가족들은 충격에서 벗어나 현실을 인식하고 아픈 마음를 서로 보듬으면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이때의 심정을 <감사하다. 잘 견디고 이겨내는 모습이 한없이 대견스럽고 가슴 벅차다. 하루하루 1분 1초, 기적 같은 날들>이라고 적었다.

가족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몸무게였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보통 이목구비가 어떻고, 누굴 닮았느니 하고 얘기들을 하는데 우리는 오직 몸무게에 매달렸다.
승리는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면서 태어난 지 23일만에야 겨우 1kg을 넘어섰다.
우유 먹는 양도 1cc에서 2cc로 늘었다. 그러나 하루 한 끼에서 심지어는 네 끼까지 금식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그럴 때마다 딸아이는 고통스러운 시간만큼이나 힘들어했다.

<쉽지 않을 거란 걸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접하는 소식이 내 마음을 폭풍우속에 밀어 넣을 때 냉정할 수 없는 게 부모 심정이련만······
승리야! 씩씩하게 조금만 더 씩씩하게 힘내주렴. 제발 ~~ >
( 2012. 3. 10 딸아이 싸이월드에서 )

<아버님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귀한 딸 주셨는데- 이렇게 힘들게 해드려서 >
<아니다. 내가 오히려 고맙구나. 너희들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느냐 >
<저는 승리문제는 이젠 저희의 손을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병원에서 하는 치료에 순응하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2012년 3월, 사위와의 대화에서 )

그래 너희들이 나이 먹은 나보다 낫구나, 그래서 부모구나.

가족회의를 거쳐 몇 번 의논한 끝에 성혜로 이름을 짓고 출생신고를 했다.
한 달 동안 생과 사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마음 졸이며 기다리다가 한 달 이내 신고하게 되어 있는 법에 따라 마지막 날 신고를 했단다.
이제 승리는 주민등록번호가 1202~로 시작하는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입원 1개월이 지나면서부터는 면회 때마다 가족들의 응원이나 격려 메세지, 음악 등을 녹음해서 들려주면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등 반응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너무 조그맣다. 인공호흡기 제거를 시도했는데 작아서 잘 안 된다고 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을 돌보는 의사, 간호사들의 정성은 참 남다르다는 걸 느꼈다.
면회 때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의사, 엄마노릇을 대신해주는 간호사들, 특히 매일 아침 아기상태를 문자로 보내주는 수고는 가족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힘이 되어 주었다.
그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정성이 승리뿐만 아니라 연간 3만여 명의 이른둥이들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입원 2개월 만에 몸무게가 1.5kg이 되었다. 가족들에게 1.5라는 숫자는 그만큼만 되어도 원이 없겠다던 간절함 같은 것이었다. 태어난 지 한 달은 200g도 늘지 않아 애간장을 태우더니- 이제 조금씩 어둠이 걷혀가는 느낌이다.
몸무게가 10g만 늘어도, 우유가 5cc만 늘어도 가족들에겐 희망이고 미래였다.
2개월 넘게 머물던 딸네 집에서 철수하기 전 날 가족들이 모여 승리에 대해 앞으로 지켜야 할 룰(Rule)을 만들었다.
* 승리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 하지 못한 일에 대해 절대로 후회하거나 체크하지 않기
*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다른 얘들과 비교하지 않기
*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건강하게 키우는데 집중하기

입원 2개월이 지나면서 승리는 몸무게 1.5kg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드디어 모유를 먹이기 시작했다. 여태껏 특수 분유를 먹이다가 이제 처음으로 우유병에 엄마젖을 담아 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딸아이는 언제 먹일지 모른다고 하루 5~7번씩 모유를 짜서 냉동고에 보관해놓았는데······
이제부터는 보냉박스에 모유를 담아 병원으로 공수하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반응 없이 잘 먹는 것같았다.
간호사가 모유먹이는 걸 창밖에서 지켜본 딸아이는 애써 눈물을 삼켰다.
□ 승리는 전신 마취후 실시한다는 안구망막증 수술등 몇 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겪으면서도 무럭무럭 자라주었다. 그리고 입원한지 80일만인 어버이날, 신생아 중환자실을 나와 일반병실로 옮겼다.
어버이날 가장 축복받은 선물이다. 그저 고맙고 대견할 따름이다.
딸애는 <어버이날, 나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준 승리! 감사하고 행복한 오늘밤>이라고 적었다. □ 퇴원이 예정보다 10일정도 늦춰졌다.
시신경이 잘 자라지 않고 몸무게도 작아 당분간 입원을 계속해야 한단다.
딸애가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에 풍랑이 인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한 건 아니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심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생명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단단한 바위틈에서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들을 생각해본다.
인큐베이터 작은 공간에서 인공호흡기와 주사제에 의해 겨우겨우 생명을 유지해가던 아이. 힘들게 버티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 특히 엄마는 항상 마음을 졸이며 살았을 것이다. 말도 못하고 때로는 가슴을 치며 후회를 했을 거고, 때로는 불면의 밤을, 때로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부모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연락이 오면 한밤중에도 병원을 찾았고, 병원에서 요청하면 특수한 약이라도 만사를 제쳐놓고 구해왔다.

[특별한 선물(Special Present)임을 깨닫다]
마침내 승리가 퇴원을 했다.
입원 내내 병원에서 가장 작게 태어난 아이가 107일만에 부모 품으로 돌아왔다.
엄마뱃속 대신 인큐베이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기구한 아이.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말 못하는 승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 아빠였을 것이다.
처음으로 아이를 안아보았다. 참으로 묘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래 그래 고맙다, 승리야.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어주어서- 정말 고맙다.
승리를 가족 품으로 돌려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퇴원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이른둥이는 각종 질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른둥이는 폐가 덜 성숙되어 있기 때문에 호흡곤란증후군을 겪기 쉽고, 신생아 만성 폐질환이 생길 수 있다.
피부가 얇아 체온조절이 어려운데다가 면역력도 크게 떨어진다. 뇌성마비, 지능저하, 괴사성 장염, 빈혈등 다양한 질환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승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틈틈이 이른둥이에 대한 공부를 해두었지만 어떤 특수한 상황에 부딪칠 때는 괜히 공부를 했다고 싶을 정도로 나 자신부터 자신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고, 아이상태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는 것같았다.
이른둥이 가족들은 아이 상태가 각각 다르므로 지식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편안하고 일관된 마음으로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퇴원 후 일주일 간격으로 진료 받거나 검사해야 할 과목이 10개도 넘었다.
소아청소년과, 안과, 이비인후과, 소화기내과. 재활의학과, 심장내과, 신경과, 호흡기 내과 등. 부모는 승리의 양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도와달라는 사위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우리 부부는 -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 40년 넘게 살아 온 서울생활을 청산하였다.
딸네 집 근처로 이사를 하였지만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게 만만치 않았다.
병원 가는 날짜에 진료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하기도 했지만 2~3개과를 거치면 보통 반나절이상이 소요되었다.
이런 생활이 일주일 단위로 4개월 가량 계속되었다.
호흡기 검사, 심장, 뇌파검사등 실시, 안과는 여전히 왼쪽 눈 끝부분 상태가 좋지 않고, 내과는 초음파 결과 뱃속에 5센티 가량의 물혹이 보인다는데·····
(계속 진료 관찰요망 등) 병원 오갈 때마다 오직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바라면서 2012년 여름을 참으로 뜨겁게 보냈다.

승리는 세상에 나온 지 4개월만에야 몸무게 3.4kg, 키 49cm가 되었다.
이제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이 된 것이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850g에서 3.4kg까지 참 대단한 일이다.
승리를 안고 처음 젖병을 물리던 날은 만감이 교차하였다.
모유를 짜서 냉동 보관하였다가 온도를 맞춰 약과 함께 먹이는 것인데 큰손녀 때와는 다른 감동과 전율의 시간이었다.
새삼 생명에 대한 신비와 경외감이 느껴졌다.

한두달 평온하게 지나간다 싶었는데 찬바람이 불면서 승리가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라 평소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도 결국 폐렴증상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승리를 중환자실에 입원시키고 돌아오면서 딸아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오늘밤 잠들기가 너무 힘들다. 자꾸 어디선가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도 모르고 기침소리에 잠깨어 뒤척이면서 아이에게 짜증내던 내가 참 한심하다. 그리고 지난 7개월을 어렵게 붙잡아오던 마음이 오늘 밤은 마냥 무너진다 > (2012. 10 딸아이 싸이월드에서 )

다행히 상태가 호전되어 3일 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지만, 겨울 내내 감기, 기침를 달고 살아 걸핏하면 병원을 들락거리며 약으로 버티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승리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1년이 되어 첫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 1년의 시간이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지만 그저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도 고맙고,
날쌘돌이처럼 기어다니는 것도 고맙고,
나를 보며 방긋방긋 웃는 것도 고맙고,
감기 외에는 큰 탈없이 잘 먹고 잘 자는 것조차도 고맙고 신통하다.
첫째 때와는 특별할 거라곤 없는 행동 하나, 말 하나, 웃는 거 하나에도 감동을 받는 것은 승리가 출생부터가 특별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라 예쁘기도 하지만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기적처럼 우리에게 온 아이. 무얼하든 예쁘지 않을쏘냐.
뱃속에서도, 태어나서도 내가 많이 안아주지 못해 늘 눈으로만 지켜봐야하는 미안한 아이. 그래도 건강하게 자라주는 너는 사랑보다 깊은 은혜, 부끄러운 내 삶에 새겨진 승리의 흔적. 오늘도 우리는 너를 통해 웃는다.> (2013. 3월 딸애의 카카오스토리에서)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어린이집에 다니던 큰손녀가 유치원에 입학을 하였다.
딸애는 각종 치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 발목때문에 1년 넘게 고통을 받고 있었고 결국 수술을 결심하게 되었다.
일주간의 입원과 두 달간의 깁스와 목발착용, 그리고 재활기간동안 집안 살림과 큰손녀 유치원 보내는 것은 집사람이, 승리 돌보는 것은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2013년의 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안과검사 결과 당장 시력교정용 안경을 착용해야 된다는 판정이 나왔다.
이른둥이로써 가장 걱정했던 문제가 현실이 된 것이다.
약을 세번 넣고 울고 불고 난리치는 고통 속에서 검사(이 검사를 할 때는 가족은 차마 못본다 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간호사들이 아이를 붙잡고 한다)를 하는데 진료실 밖에서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에 귀를 막아야만 했다.
고도근시, - 7.5
그래 애가 큰 탈 없이 자라니까 다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안경을 제대로 쓰기까지는 3개월 정도의 고생이 뒤따랐다. 승리는 답답했던지 걸핏하면 안경을 벗어서 내팽개쳤고, 대중이 많은 곳이나 모임등에 데리고 갈 때는 일일이 설명하기가 힘들어 딸애가 일부러 벗겨놓고 다니기도 했다.
요즘에는 잠 잘 때 승리가 안경을 벗어 식탁위나 책상위에 놓고 잘 정도가 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안쓰럽다.
아무튼 이 아이가 성인이 될 때쯤이면 시력 교정술이 크게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승리가 수두를 한다. 목욕을 시키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이지만 여기저기 붉은 반점이 올라왔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라 그런지 잠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않고 보채기만 한다. 아이를 안은 채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래도 감사하다. 정상적이기 때문에 수두도 하는 것 아닌가 -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 두 번째 교정 생일(병원에서 퇴원한 날)을 맞았다. 승리는 생일이 두개다.
원래 태어난 날과 병원에서 퇴원한 날이다. 그렇다고 뭐 특별하거나 호들갑스럽게 지내는 것도 없다. 남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보낸다.
승리가 생일축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촛불을 호호 불어 끄고, 박수를 치며 깔깔거리는데서 가족들은 작은 행복을 느낀다.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다지만 또래에 비해 몸무게가 좀 적고, 안경을 쓰고 있고, 감기치레도 자주 하고-
엄마는 때로는 속상해 하면서도 승리를 통해 감사와 나눔, 희생을 배워가고 있다.
□ 2년 여만에 정기검진을 졸업(?)하였다.
퇴원하고 나서도 일주일에서 보름, 보름에서 한 달, 한 달에서 두 달 또는 서너 달 간격으로 정기검진을 받았던 승리는 30여 차례가 넘는 병원진료 끝에 마침내. 2014년 6월 20일 안과를 제외한 모든 검진을 졸업하였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내장에 혹같은 게 보여 3개월 단위로 초음파 검사를 하며 수술해야 될 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최종검사에서 그 혹같은 것도 없어졌단다.
유아 신체발달검사 자료를 검토하던 담당 주치의는 승리를 안아주면서 <정말 잘 컸네요. 이제 병원에는 특별하게 안오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날의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많은 세상사를 포기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렸던 시간들......
다행히 승리는 큰 병치레없이 비교적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고, 이제 그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는 가족들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더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최선을 다해 승리를 지켜나갈 것이다.

[에필로그 (Epiloque)]
승리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른둥이가 태어나면, 특히 저체중아일 경우 과연 살 수나 있을까?
키우다가 세상을 떠나는 건 아닐까? 치료할 수 없는 장애를 입게 되는 건 아닐까? 우리 가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모든 이른둥이 가족들의 비슷한 고민일 것이다.
그러나 초극소 저체중아 승리도 이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격려로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이른둥이를 키우면서 일어나지 않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미리 겁먹거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으면 답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 부부를 보고 주변에선 딸 바보니, 나중에 후회할거라는 등 하면서 딸네집 근처로의 이사를 말렸지만 나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승리는 어정쩡한 금연상태에 있었던 나로 하여금 확실하게 담배를 끊게 해주었다. 금연을 결심하고도 끊고 피우기를 십여 년 동안 반복해왔는데 승리 때문에 금연에 성공하게 되었으니 이처럼 고마운 은인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그렇게 운동해도 줄지 않던 복부사이즈를 4센티나 줄여 주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지난 2년여 동안 이른둥이로 인해서 고단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항목-겸손을 알게 되었고, 봉사* 배려* 양보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며 if 라는 단어가 어느 누구에게나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해보는 시간도 있었다.
우리나라도 여러 가지 사유로 이른둥이 출산이 많아지고 있는데 생명 탄생과정에서 한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묵묵히 노력하며 지키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 나에게는 새로운 꿈과 목표가 생겼다.
이 땅의 이른둥이들을 위해 무언가 힘을 보태는 일과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서 승리가 시집가는 날을 보는 - 그런 꿈 말이다.

<어느새 친구처럼 훌쩍 커버린 두 아이. 3살 승리는 일어나서부터 잠 잘 때까지 주로 책과 함께 한다. 블럭도, 퍼즐도, 풀과 가위도, 스티커도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덕분에 요즘엔 언니가 제법 열심히 책을 읽어준다 >
< 요즘 그녀의 주관심사는 언니의 일상이다. 언니가 유치원에 갔다 오면 까꿍~ 어흥~ 찰칵찰칵~ 귀여워를 연발하며 놀아달란다. 첫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아이- 난 이 아이가 우리에게 특별하게 온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는다 >
(2014. 7 딸애의 카스에서)

- 끝 -

29살 지구별 꼬꼬마의 향기로운 사랑을 전하는 삶의 이야기
[지구별 급행열차를 탄 꼬꼬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뜨겁게 7년을 사랑하고 1986년 3월 9일 함께 거니는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고서 떠난 설레임의 여행 바로 신혼여행! 그 설레임의 시간 속에서 생긴 축복의 허니문 베이비! 그런데 그 아이는 얼마나 빨리 세상에 오고 싶었던 탓이었는지.. 아이를 품고 있던 엄마가 쇼크로 쓰러지고 몇 일이 되지 않아 찔끔 찔끔 묻어 나오던 양수를 이상 징후로 느끼지 못하다가 지속되는 것에 이상함을 느껴 이웃사촌 아주머니께 여쭈었다가 양수가 터진 거 같으니 어서 병원에 가보라는 말에 병원에 갔을 때엔 이미 많은 양수가 빠져 나온 상태였고, 그 당시 병원에서는 자연분만을 유도해서 배 아플 거 다 아프고 힘들 거 다 힘들어하다 안 되어 결국 제왕절개로 1986년 9월 14일 26주 만에 1Kg의 몸무게로 저는 그렇게 지구별 서울 땅 어느 병원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힘들게 태어난 만큼 가족의 품으로 안기기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이른둥이” 에 미숙아로 태어난 저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인큐베이터” 라는 곳에서 입으로 먹는 우유가 아닌 콧줄로 영양분을 공급 받으며 한 달이 지나 2Kg가 되고서야 사랑하는 엄마, 아빠, 가족들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늦는 줄만 알았던 발육과정 But 생후 6개월에 판정받은 장애 “강직성 뇌성마비”]
두근두근 설레임, 사랑의 결실로 엄마, 아빠에게 마냥 사랑스럽기만 한 첫 아이였던 저는 어렵게 태어나 가족의 품에 안겼던 만큼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아이였습니다. 더욱이 외가에서는 큰 딸이었던 엄마가 낳은 첫 아이니 더욱 귀하고 예쁠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뒤집기를 할 때쯤이 되도 뒤집기를 안하던 저를 엄마는 개의치 않게 여기며 조금은 늦을 수 있겠지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걸어오는 꿈을 엄마와 외할머니가 동시에 꾸게 되었는데 이를 심상치 않게 생각하던 외할머니는 병원에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를 했고, 그 때 당시 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 안심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어느 대학병원에 진료를 보러 갔는데 그 때 “강직성 뇌성마비” 라는 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태어날 당시 양수가 터지고 시간이 꽤 흐른 뒤에 자연분만까지 시도하다 제왕절개를 했기 때문에 저산소성으로 생긴 장애일 수 있겠다는 추측을 나중에서야 해보게 되었지요. 장애 판정을 받았던 그 때는 고작 생후 6개월. 첫 아이를 향한 설레임과 기쁨도 잠시 처음 들어보는 장애와 앞으로의 징후, “언어의 장애가 올 수도 있고, 인지 장애는 물론 사시가 있을 수도 있으며, 운동장애가 와서 걷지 못할 수도 있어요.” 라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그 상황을 마주한 엄마는 얼마나 속이 상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을까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엄마는 낙심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빨리 장애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저는 엄마와 함께 여기저기 복지관과 병원을 다니며 재활치료를 시작했지만 그 때 당시에는 “재활”의 개념은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었어요. 복지관 치료사 선생님이 주는 팁을 통해 남동생 유치원에서 가져오는 동시 외우기나 유아 학습지 같은 것을 통해 언어의 훈련은 물론 다른 아이들과 같이 뒤쳐지지 않게 지금으로 말하면 홈스쿨 같은 개념으로 엄마가 매우 열심히 시켜주셨어요. 덕분에 두 살 터울 이었던 남동생과 늘 누가 먼저 시를 외우나 대결하기도 했고, 미술, 음악, 여행 등을 통해 다양한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배우게 해주며 아침에는 클래식으로, 낮과 밤에는 동화CD와 책으로 듣고 보고 생각하게 해주던 엄마의 부던한 노력 가운데 저를 치료하던 치료사 선생님이 어느 날, 재활로 좋은 병원이 있다며 “신촌세브란스재활병원”을 소개해주었고, 의자가 있어야 겨우 앉을 수 있었고, 무언가를 받쳐주지 않으면 중심도 못 잡고 눕혀 놓으면 다리가 강직이 워낙 심해 오그라들어 다 펴지지도 않고 , 늘 강직이 있어 뻗히기만 하던 6살 아이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본격적인 재활의 시작, 꼬꼬마의 통곡의 울음바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의 시작

의자나 받침대가 없으면 혼자 앉는 것은 물론 서지도 못할 만큼 뻗치기만 하던 6살 아이는 재활병원에 입원에 본격적인 재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그 때 당시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은 외할머니에게 맡겨져 외가에서 자라야만 했고, 엄마는 저에게 올인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웬걸요. 6살 꼬꼬마에겐 그 시간이 너무나 힘겨울 뿐만 아니라 피하고 싶은 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오전, 오후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치료실에 가는 순간은 늘 통곡의 울음바다였습니다. 펴지지 않는 다리를 기계에 눕혀 억지로 펴고 찍찍이로 고정시켜 세우다니 어린 나이에 저는 마음 속으로 “이 아픔을 엄만 알아요?”를 내심 외쳐대며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대성통곡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담당 치료사 선생님은 늘 웃겨주려고 애쓰며 눈물을 그쳐주려고 꽤나 노력해주셨죠. 학교에 학업 시간표가 있다면 병원엔 치료시간표가 있어 늘 매일을 그렇게 정해진 스케줄 따라 물리치료실, 작업치료실, 언어치료실 등을 바쁘게 다니다가 병실에 돌아와 숨을 돌릴 때쯤이면 또 다른 선생님이 와서 하루에 8시간을 치료와 공부로 보내던 시간.. 어린 나이의 어찌나 피하고만 싶던지.. 어린 것이 머리 쓴다고 어느 때엔 그 선생님이 오실 시간 때쯤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을 가서 30분을 족히 앉아 있다가 나오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ㅋㅋㅋ) 그렇게 정말 미친듯이 재활을 받던 시절. 주치의 교수님은 너무나 인자하신 분이셨으나 치료에 있어서는 매우 엄격하고 확실하신 분이었습니다. 회진 오셔서 질문을 하시거나 무언가를 요구 할 때면 늘 긴장하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재활의 올인 되던 그 때 주치의 교수님께서는 “척추후신경절제술” 이라는 수술을 권유하셨고, 강직을 유도하는 신경을 끊어주므로 뻗치는 게 더 좋아질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지만 그 때 당시 보편화된 수술이 아니었기에 걱정은 됐지만 좋아진다 하니 무언들 못하겠어요. 그렇게 엄만 굳은 결심과 함께 어린 저를 수술실로 보내시곤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8시간의 긴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서 나와 병실로 온 저를 맞이하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했던 첫 마디가 아직도 저는 기억 납니다. “엄마, 포카리스웨터 줘~” (수술이 뭔지, 지금 내가 무슨 상황 속에 놓인 것인지 아픈 것도 몰랐습니다.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저 목이 말랐거든요.ㅋㅋ) 덕분에 긴 시간을 마음 졸이며 걱정하던 엄만 딸 아이의 이 한마디에 웃으며 안심했던 모습도 기억 나네요.^^ (엄마도 이 아이가 수술하고 나온 아이가 맞나 싶었다고 해요 ㅎㅎ)
그러나 이 단순함도 잠시. 수술한 척추 부위에 딱딱한 보호대를 차고 있어야하니 미치도록 간지러운 것을 긁지도 못하고 드레싱 시간만을 기다리며 견디는 게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럴 때마다 엄만 부채질을 해주며 다른 화제로 상황을 돌려주기도 했었죠. 그런 인고의 시간을 지나고 척추 보호대를 풀던 날은 제게 거의 해방의 날이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즐거움도 휘리릭. 더욱 빡쌘 재활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의자가 아니면 받침대가 없으면 혼자 앉지도 못하던 제가 혼자 중심을 잡고 앉게 되고, 워커를 잡고 서고, 병원 경사로로 1층부터 7층까지 엄마와 걸을 수도 있게 되었지요. 그렇게 보내 온 1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성공적인 수술과 치료로 인해 주치의 교수님께 들을 수 있었던 한마디. “조금만 더 하면 보통 아이들처럼 걸을 수 있을거 같습니다. 어머님” 그 당시 7살이던 저야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와 치료사, 의사선생님의 강제적인 것으로 따라 해 왔지만 포기하지 않고, 동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머금고 제게 올인하며 저의 작은 변화를 바라보던 엄마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나중에 몸도 마음도 머리도 크고서 생각하니 마음이 참 먹먹했습니다.


아빠 회사의 어려움, 이사, 중단된 재활 치료 그리고 학창시절, 막내의 탄생, 엄마의 교통사고

하지만 그 재활치료의 연속성은 쉽지 않았습니다. 7년이라는 시간을 “재활치료” 라는 푯대만을 바라보고 달려오던 어느 날, 아빠의 회사에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고, 실직자가 되었던 아빠는 친할아버지에게서 아빠의 고향인 순천으로 내려올 것을 권유 받았습니다. 선뜻 가겠다고 결정하지 못했던 것은 저를 향한 포기가 없던 엄마의 마음 때문이었지요. 이제 막 일반초등학교(그 때 당시 “국민학교” )에 입학한 저를 가르치고 치료 시키며 남동생마저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올인하여 달려온 시간 속에 조금만 더 하면 보통 아이들처럼 걸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말을 듣고서 그 어떤 부모가 포기할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 낙후된 시골에서 중단될 치료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엄마와 아빠는 해야만 했을까요. 하지만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은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엄마와 저와 제 동생에게는 너무나 낮선 그러나 아빠에겐 추억이 깃든 고향 땅 순천으로. 제게도 남동생에게도 너무나 낮선 곳이었지만 어린 저희에겐 낮설음보다 신기한 것 투성이었습니다. 도시에 아파트에서 지내다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에 나무들이 우뚝 서 있고, 마루가 있는 할아버지가 빌려주신 그 한옥집은 그저 새로울 뿐이었습니다. 그 한옥집에 작은 단칸방에서 4명의 가족은 늘 꼭 껴안고 딱 달라붙어 잤습니다. 엄마는 싱크대가 아닌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하며 늘 식사 준비를 하면서도 꿋꿋이 이겨내며 자식들을 양육하고 남편을 내조하던 엄마 그런 엄마의 내조에 아빠는 광주에 직장을 구해 출퇴근을 했고, 조금씩 회복되어갔습니다. 그런 시즌에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이사를 온 저를 두고 고민하다 6개월을 쉬고선 9살이 되던 해 2살터울인 남동생을 이른 입학으로 하여 저와 동생을 동시 입학을 시켰습니다. 엄마가 해줄 수 없는 부분을 동생이 챙겨주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었다고 하더군요.
학교를 입학하고 나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재활치료” 라고는 꿈도 못 꿀 시기였죠. 이른 아침 일어나면 엄마는 저와 동생을 동시에 씻기고, 작은 흠도 잡히지 않으려 오히려 더 이쁘게 늘 매일 매일 다른 원피스와 머리띠를 해주곤 깔끔하게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학교가 마칠 때쯤이면 데리러 오던 엄마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녹초가 됐겠어요. 그런데 1학년 담임선생님은 당시 수영부 전담 선생님이었는데 엄마에게 저를 수영을 시켜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 하시며 물 속에서 다리를 움직여주면 도움이 될 거 같다며 선생님 딸과 저를 늘 데리고 수영장에 데려가 언니들 훈련시키고 짬을 내 물속에서 발차기와 움직임을 유도하는 등 많은 애를 써 주셨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그 때부터 수치료를 경험했던 아이네요.^^ 감사하게도 그렇게 1년을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엄마에게 다리 보조기를 건네 받아 채우고선 수업을 받게 했고 수업 마치면 수영장으로 직행하여 수영장에서 언니들이 훈련 받을 때 발차기와 움직임을 끊임없이 하고 고된 운동이 끝나면 선생님 집으로 가서 언니오빠들과 꺄르르 거리며 노는, 힘들지만 마냥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고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제게 글쓰기를 시켜보자는 권유에 시작했던 글짓기. 원고지에 끄적끄적 써서 내면 제가 쓰는 글은 조금 미흡했지만 잘 가르쳐주신 선생님 덕분에 어린 나이에 백일장에 나가면 늘 상을 수상해오다보니 그런 저를 보는 엄마는 참 행복해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학창시절 시간 속에서 저의 부족함보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가며 지내다보니 제 스스로 “난 몸이 불편하구나. 난 아픈 아이구나.” 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도 감사한 일이지요. 그렇게 해를 거듭해 성장해가며 때론 나의 다름으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면서도 내가 못 걸어서 그런거라고는 추후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참 신기하게도. 그냥 “내 물건을 탐내는 친구, 뺏어가는 친구, 날 놀리는 친구” 라고만 생각했을 뿐.
그러던 11살의 어느 날, 엄마의 배가 뽈록 튀어 나오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런 제게 엄마는 말했죠. “여기에 동생이 있어~” 세상에 동생이라니. 이 작은 배에 아기가 있다니. 셋째, 막내 동생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품고 있는 엄마였지만 여전히 저를 먼저 생각하던 엄마였기에 뽈록 불러오는 배에도 불구하고 저를 업고 학교를 오르고 내리고 했었죠. 끼니도 잘 챙겨먹지 못하고 늘 등하교를 챙기던 엄마였기에 뱃속에 동생은 잘 클 수 없었지만 잘 견뎌주어 제가 4학년이 되던 12살 해에 조금 일찍 출산해도 괜찮겠다는 의사에 말에 막내 남동생 또한 “이른둥이” 였지만 건강하게 태어나주었습니다.
막내가 태어나던 시기에도 아빠 직장의 어려움으로 실직을 했다가 경비를 하며 생계를 책임질 때였지만, 그 어느 가정처럼 행복하고 단란했던 우리가족. 여전히 강하던 우리 엄마와 아빠가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그런 우리에게도 감당치 못할 어려움이 왔습니다. 격일로 늘 경비 일을 하던 아빠에게 간식을 챙겨 가져다 주러 자전거를 타고 가던 길에 엄마가 교통사고 난겁니다. 아침에 눈 떠보니 엄만 없고 아빠가 엄마의 옷가지를 챙기러 와 병원을 가야한다는 말에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게 기억이 나네요. 막내는 갓 태어난지 얼마 안된 상태에 저와 큰 남동생도 어리기만 했던 그 시절, 엄마의 기나긴 병원생활은 시작되었고, 아빠가 근무인 날에는 막내 남동생은 유모차에 태우고 유모차를 제 휠체어 앞으로 배치하고 제가 유모차를 잡고 밀면 큰 남동생은 제 휠체어를 밀어서 기차놀이하듯 학교를 등교하곤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잘 챙겨주셔서 수업 중간 중간에 막내를 돌봐 주시기도 했고, 막내가 자다 깨면 같은 반이던 큰 남동생은 뒤로 가서 막내를 업고 수업을 듣고 했죠. 갓난아이였지만 국에 말아서 밥을 주면 순순히 잘 받아먹던 막내의 모습이 눈에 선하기도 하네요.
기나긴 엄마의 2년 병상생활이 끝나고 걸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뒤 엎고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한 엄마에게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찾아왔습니다. 오래도록 꿋꿋이 잘 견뎌오던 엄마에게 여러 일이 겹치면서 우울증이 찾아왔죠. 힘겨운 시간들을 우리 가족은 맞이해야 했지만 저에게 동생은 커 오면서 참 든든한 역할을 잘해주었습니다. 중학교를 입학하며 흩어진 저와 큰 남동생이었지만 엄마가 아파 학교를 못 갈 때는 큰 남동생이 등굣길에 데려다 주고 가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이 데리러 와서 함께 가기도 하며 제 학창시절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우울증, 저에게 찾아온 피할 수 없는 사춘기가 겹치며 많은 어려움들과 늘 부딪힐 수 밖에 없었고, 그 때야 비로소 처음으로 “장애”를 가진 제 자신을 몸으로 마음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다른 내 모습, 할 수 없는 것이 느껴지고 보여 지는 순간들의 속상함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순간들 속에 그나마 감사한 것은 “장애”로 인해 배려 받아 근거리 중․ 고등학교를 배정 받아 갔었는데 기독교 미션스쿨이었고, 그 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함께 어울리면서 그 친구들은 제게 있는 연약함을 받아주기도 했지만 순순히 이해해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혼자 할 수 있는 법을 혹독하게 알려주었습니다. “혼자 화장실 볼 일 보는 법”,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마운 마음 표현하는 법”, “왕따를 당할 때 대처하는 법”, “수동 휠체어를 혼자 운전하는 법” 등.. 우리 엄마보다 더 강하게 훈련시키며 “몸이 불편하니까, 장애가 있으니까” 라는 이유 따위는 필요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마운 건 그렇게 만난 중학교 친구들 중에 저와 함께 고등학교도 진학해 준 친구들도 있었으니 든든했지요! 그렇게 함께 학창시절은 물론, 신앙생활도 하며 야간자율학습 땡땡이도 치고 공원에서 늦게까지 수다도 떨고, 놀러 다니며 신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나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이룰 수 없었던 대학의 꿈 가운데 새롭게 시작 된 재활과 사회생활]

다사다난했지만 즐거움도 많았던 학창시절을 지나왔던 것만큼 대학진학 또한 당연히 여느 친구들처럼 생각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던 저는 특수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2살 터울 큰 남동생과 동급생이다 보니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접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접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조금 늦게 간다고 생각했지요. 친구들은 대학생활을 누릴 때 저는 집, 교회, 집, 그리고 취미생활이 전부여야만 했고, 무료해지기 시작할 무렵, 작업치료학과를 진학한 절친 친구가 재활을 다시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냐며 권했지만, 어린 시절만큼 따라주지 않는 체력을 지니신 부모님은 흔쾌히 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를 친구는 직접 복지관으로 병원으로 다니며 재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복지관 치료사로부터 여긴 뇌성마비를 제대로 치료하는 법을 모르니 어린시절 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방법을 배워오면 해주겠다는 말에 “방법만 배워오자” 아빠를 설득했고 15년 만에 다시 내 고향 서울로 엄마와 함께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15년 만에 다시 찾아 온 세브란스는 여전한 듯 참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재활의학과 진료. 그런데 이게 웬걸. 재활치료를 오래 쉬어서 겉으로 보기와 다르게 속은 고장 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왼쪽 고관절은 빠져 있었고, 한 쪽으로만 앉아서 돌아간 대퇴부, 굳어진 무릎, 짧아질 대로 짧아진 근육과 척추,측만증까지. 어린 시절 걸었던 기억과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리의 힘만 붙으면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저의 짧은 생각은 큰 오산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생각할 틈도 없이 재활의학과 주치의 교수님은 소아정형외과로 연결해 얼떨결에 고관절과 다리 수술 일정이 잡히게 되었고, 그렇게 8번에 크고 작은 수술들을 거치고 물 흐르듯 자연스레 시작된 재활치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오래도록 쓰지 않았던 다리기에 근육들은 많이 말라 있었고, 흐트러진 몸의 정렬을 맞추어 서기도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섰던 기억과 걸었던 기억이 치료에 꽤나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시금 시작된 재활치료의 푯대를 향해 달려온 지 언 만 6년이란 시간이 되어갑니다. 22살이던 저는 어느새 29살이 되었고, 포기하지 않고 격려해주시며 기도하는 가운데 수술에 임해주신 소아정형외과 주치의 교수님과 재활의학과 교수님, 수 많은 의료진들, 함께 동거 동락한 환자들, 늘 어려운 순간마다 치료가 멈춰지지 않고 꿈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치료사 선생님들과 사회복지사 선생님, 기도로 늘 힘을 실어주는 Faith Mate들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고, 입원치료를 하며 5년 전 뒤늦게 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그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나와 같은, 또는 비슷한 여러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격려와 꿈이 되어주고 디딤돌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저는 도전 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 내 꿈이 이루어지지 아니해도 제게 심겨진 꿈의 씨앗은 언젠가 마침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것을 알기에 기다립니다. 어린 시절 교회 권사님이나 집사님들께서 늘 제게 “넌 성경 속 앉은뱅이가 일어나듯 기적처럼 일어 날거야” 라고 말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때 이런 고백을 제 마음 속으로 하며 기도했습니다. “기적처럼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과정, 과정 속에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만나게 하시는 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다면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할 수 있다면 저는 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저의 애마 (전동휠체어) 씽씽이를 타고 다니는 뇌성마비 지체장애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전히 남들보다는 조금 더딘 세상의 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함께 동행 할 수 있는 삶과 신앙의 Mate들을 보내주셔서 사회생활도 시작하여 일하며 어울리며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렇게 제 작은 꿈들과 경험과 상황들이 모여 장애아동들과 세상의 디딤돌뿐이 아닌 세상과 사람의 사랑의 디딤돌이 되어 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 힘과 노력도 있지만 그 것이 전부가 아닌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만나서 함께 걷는 길로 동행하는 길로 나아가는 제 삶의 걸음, 걸음을 기대 합니다 !! ^ㅡ^)/


[세쌍둥이 아빠의 육아기]
요즘 무럭무럭 커 가는 세쌍둥이들을 보면 정말 꿈만 같습니다.
늦은 결혼에 아기들을 많이 기다려오다가 드디어 좋은 소식. 그런데 세 쌍둥이..... 기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생각이 복잡하더군요.
임신중 응급실 방문과 입원도 수 차례.... 그 와중에 신종플 루도 걸리고...... 우여곡절 끝에 아기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32주 4일만에 각각 1.89, 1.89, 1.74kg의 작은 몸무게로 세상 밖으로 나와서 소아중환자실에서 하루 하루를 보낼 때를 생각해보면 지금 정말 감사하네요. 그 당시 매 순간 아기들의 무사퇴원만을 위해 기도로 하루 하루를 보냈던 일이 생각납니다.
TV에 나오는 모 탤런트들이 쌍둥이, 세쌍둥이를 키우느라 고생하고 있는 걸 우연히 봤어요.
TV 속 세쌍둥이 육아는 힘들어 보이지만, 제가 직면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더군요. 환경이 너무 다르니까요. 마치 일반인이 연예인 결혼식, 집 구경하는 느낌이더군요.
출산 직후 3명의 아기들의 중환자실 입원과 인큐베이터 사용으로 병원비가 많이 걱정되었어요. 특히 둘째는 폐에 문제가 있어서 82일 동안이나 중환자실에서 고생했습니다. 치료비도 상당히 많이 나왔었습니다. 다행히 정부의 미숙아 지원 프로그램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100% 지원이 아니었지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액 지원을 받기 힘들었고, 다둥이 이거나 여러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만 지원이 되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 우리 아기들은 다행히 3개월에 모두 퇴원할 수 있었지만 1년 가까이 중환자실에 있어서 도움을 받지 못한 아기들 얼굴을 보니 참 안타깝더군요.
중환자실 퇴원 후 아기들을 보니 너무 기뻤습니다.
세쌍둥이를 키워보니 돈과 사람의 도움이 절실히 느껴지더군요. 양가 아기들 할머니들은 건강이 안 좋으셔서 도움에 한계가 있었고, 정부 보육지원 프로그램을 전부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체 금액지원을 받기는 거의 불가능하더군요. 산후조리와 도우미 서비스 몇 주 받았습니다.
아기가 셋이라 모유가 모자라서 둘째와 셋째는 어쩔 수 없이 분유를 주로 먹였어요. 기저귀도 처음에 천기저귀 쓰다가 감당이 안돼서 바로 포기했어요. 물론 중간 중간 천기저귀를 쓰기도 했지만 아기가 셋이라 도저히 감당이 안되더군요.

육아비가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육아를 위해 부인은 휴직하고 외벌이로 가계를 꾸려나가야 하는데 적자였죠. 그 동안 모아둔 거 다 썼었네요. 분유랑 기저귀만 한 달에 90만원이 넘더군요. 세 자녀 이상 이라서 정부 지원은 10만원*3. 도움이 되었지만 좀 아쉽더라고요. 지금은 다둥이 지원은 폐지되었습니다. 지금은 다자녀를 위한 혜택은 없는 것 같아요.

세쌍둥이라서 부인이 아기 하나 데리고 자고, 제가 아기 둘을 데리고 잤습니다. 분유통 20여개를 수시로 소독기에 돌리고 1시간 마다 30ml 분유를 세 명을 먹여야 하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2년여 동안 하루 1시간 정도씩 잔것 같아요. 보통 건강하게 태어난 아기는 2시간에 한번씩 수유한다고 하더군요. 보통 아기 엄마들이 수유로 잠을 못 자고 힘들다고 이야기하던 게 단박에 이해되더군요. 잠도 제대로 못자고 머리만 살짝 기대고 있다가도 아기들이 울면 벌떡 일어나서 기저귀 갈고 분유먹이고 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저보다 아기들 우선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부인 혼자 아기들 셋을 감당할 수 없으니, 육아는 남편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제 일이 되었어요. 새벽에 출근하고 5시부터 아기들을 돌봤네요. 잠을 못자고 피로가 누적되더니 건강검진결과 여러 건강 위험 신호가 오더군요. 원형탈모도 생겨서 2주간 주사를 머리에 60번 정도씩 찔렀던 것 같아요. 잠도 못 자고 온몸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아기들 웃는 얼굴을 보면 다시 힘이 나더군요. 주말마다 제가 새벽에 먼저 일어나서 육아에 지친 부인 잠 좀 더 자라고 작은방에서 아기 셋 데리고 바운서에 모빌 달아놓고 아기들 돌봤네요.

2돌 전까지는 정말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나아지더군요. 육아도 익숙해지고 아기들도 점점 커가고 병원 가는 횟수도 점점 줄었습니다. 밤낮으로 아기가 울 때마다 일어나서 분유먹이고 기저귀 갈고 정말 힘들더군요. 아기들이 울 때 너무 졸려서 눕고 싶었지만, 아기들이 중환자실에서 수액 달고 인큐베이터 안에 있던 때가 생각나서 벌떡 일어나서 아기들 먹이고 했네요.
육아 초기에 제일 힘들었던 것은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출근해서 일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출근전 새벽에 젖병 20개 세척하고, 소독기 돌리고, 기저귀 채워놓고 여러 준비를 해놓고 혼자 아침식사를 했어요. 집에 먹을게 없어서 그냥 출근길에 편의점을 들리기도 하고, 라면을 종류별로 다 먹어보고 질려서 그 다음에는 데워먹는 짜장, 카레류에 밥 비벼먹고 출근했는데...... 나중에는 토할 것 같아서 더 이상 못 먹겠더군요.

아기들이 커 갈 수록 병원에 데리고 가야되는 횟수도 점점 줄고, 아기들 수면 시간도 점점 길어지니 저도 살겠더라 구요. 흔히 백일의 기적, 돌 지나면 괜찮아 진다고 했지만...... 아니더군요. 두 돌 지나니 좀 살만 합니다만, 세 돌 지나니 아기들이 말을 안 들어서 힘듭니다. ㅎㅎ 나중에 셋 다 사춘기 오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안되네요.
보통 쌍둥이들은 조산의 위험이 있고 조산으로 태어난 아기는 건강상 여러 문제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많이 이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처음 미숙아지원 프로그램이후 다른 지원은 없어요. 한번 입원할 때마다 여러 검사와 입원실 비용이 상당해서 부담스럽더군요.
출산 전 쌍둥이들 실손 보험은 가입 거부되었어요. 그 당시 태아보험도 생명보험 회사 상품만 가입 가능했습니다. 이마저도 쌍둥이들중 첫째 아이만 보장 받을 수 있었고, 나머지 아기들은 보험가입이 거부 되었어요. 출산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보험가입이 거부되었어요. 나중에 보험 가입이 가능하다고 할 때도 보장 범위 제한이 있더군요. 마치 노인을 위한 보험인데 관절염, 고혈압, 당뇨, 암 같은 병은 보장 안되는 보험같은 느낌이더군요. 어쩔 수 없이 병원비 전액을 개인이 부담해야 되었네요. 아무튼 처음 2년넘게 병원비가 많이 들어서 고생했습니다.
아기가 셋이라 쌍둥이 유모차 하나와 일반 유모차를 끌고 다녀보니, 한국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분들이 살아가기에 많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쌍둥이 유모차는 일반 유모차보다 더 넓고 무거워요. 남자가 밀기도 쉽지 않더군요. 게다가 여기저기 장애물들.....ㅜ.ㅜ 미국은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모든 건물에 장애인 휠체어를 위한 오르막길이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은 휠체어를 위한 오르막 길 없는 건물도 많고, 그마저도 좁아서 진입이 불가능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장애인 표시 있는 엘리베이터에도 멀쩡한 사람들이 계속 사용하는 바람에 이용이 힘들었던 일이 많았습니다.
예방 접종도 무료 혜택이 안 되는 것이 많았어요. 1차 2차로 나뉘어 있는데 1차만 무료였어요. 그런데 필요성에 의해 나눈 게 아니라 비용에 따라 나눠서 저렴한 예방 접종만 지원해 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린이 집을 이용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경쟁율도 치열해서 자리도 잘 안 나고 어쩌다 자리가 나도 1명만 이용 가능하더군요. 나머지 둘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어요. 결국 포기했네요. 그 당시에는 어린이집 이용자만 정부에서 지원금을 지급해서, 전업주부인 분들도 전부 아기를 어린이 집에 보내는 게 당연시 되는 이해 안되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세쌍둥이를 데리고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더군요. 손은 두개인데 사진사 혼자 조명, 반사판, 카메라 다 들고 사진촬영을 해야 하는 느낌. 항상 손이 모자라요. 소형차를 타고 다녔었는데 카시트 3개는 장착이 안되더군요. 카니발이 왜 아빠들의 로망이 되었고, 미국에서 아기들 가진 엄마들이 왜 미니밴을 운전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보다 육아 환경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겠지만, 여전히 각 개인이 육아를 전부 감당하기에 아직 벅찬 것은 사실이네요. 현재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저출산이 해결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기를 원해도 사회 여건이 아직 힘든 것 같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제 세 돌이 지난 세쌍둥이를 키워보면서 육아를 개인에게 전부 부담 지우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 정부나 사회 지원없이 개인이 육아를 떠 안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저출산과 결혼기피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 충분한 지원 없이 출산율이 높아지기만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 같아요.

더 많은 지원을 기대합니다

530g, ‘튼튼이’에게

“…힘내자, 사랑해”
저는 튼튼이, 박지오의 엄마입니다.
저는 작년 5월, 첫아이를 유산했습니다. 그 후 제가 받은 진단은 ‘항인지질 항체 증후군입니다.

이 병은 태아 성장에 영향을 주어, 결국 습관성 유산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결혼 후 3년 만에 갖은 아기, 37살의 노산이란 꼬리표…
평소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눈물로 몇 달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다시 임신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파린 주사와 아스피린 복용,, 저는 몸을 추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난 2월 우리 부부에게 튼튼이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꼭 건강하게 지켜내리라는 생각에 태명도 튼튼이라고 지었습니다.

남들보다 더 자주 병원에 갔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하루 두번 헤파린 자가 주사와 고혈압 약..
혼자서 주사 맞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튼튼이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6월에 입원, 답답한 병원 생활..
하지만 더 자주 초음파를 보면서 튼튼이 상태를 알 수 있었기에 차라리 마음은 편했습니다. 책도 읽고, 모빌도 만들고 , 좋은 생각만 하려 했습니다.

7월 초 부터는 속은 더부룩해지고 명치 끝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심해지는 통증으로 마약성 진통제에도 통증은 조절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해지는 간경색 ..



결국 7월 17일, 25주2일, 530g의 자그마한 튼튼이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내 아들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죽는게 아닌가 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찍어준 사진 속의 튼튼이는 두눈을 가리고 수많은 주사약을 달고 인큐베이터에 누워있었습니다. 뱃속에서 더 많이 품어 주었으면, 내가 조금만 더 참았으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처음에는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눈물로 시간을 보냈고 면회때마다 울지말자 몇번을 다짐하면서 매번 눈물로 돌아섰습니다.
이런 제가 안타까웠는지 이렇게 슬퍼하고 울기만 하면 튼튼이가 다 느낀다고, 튼튼이가 일찍 세상에 나온건 엄마 때문이 아니라고, 간호사 선생님이 다독여 주셨습니다.
남편과 저는 다짐했습니다. 웃으면서 튼튼이에게 용기를 주자고. 약속했습니다.
인큐베이터에서 힘들게 사우고 있을 우리아들이게 "사랑해, 힘내자 !"수십번 말합니다.

튼튼이는 이제 박지오라는 이쁜 이름이 생겼습니다. 소소한 이벤트는 있었지만 지금은 인공호흡기도 떼고, 1 kg이 넘었습니다.
젖병수유도 하고, 먹는 즐거움을 아는지 배고프면 울고 보채기도 합니다.

병원을 다니기 위해 두시간이 넘는 거리를 다니다 보면 지치고 힘들어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 캥거루 케어를 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지오를 보면 힘을 내게 됩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꿈만 같고 기특하기만 합니다.

의료진의 노력과 현명한 선택이 없었다면 저와 튼튼이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또 하나의 엄마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게 해준 많은 의료진에게 감사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미숙아를 낳고 저처럼 자신을 자책하면서 힘들어하는 엄마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생각을 바꾸는게 쉽진 않았지만 미숙아를 낳게 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고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뱃속에서 품어주지 못한 만큼 더 많이 사랑하고 정성으로 건강하게 키우면 됩니다.

다른아가들보다 작고 일찍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게 자랄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힘들게 싸우고 있을 많은 아가들과 이른둥이 맘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가들아, 이 세상에 와줘서, 그리고 우리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파이팅! 힘내!